만원짜리 지폐 한장으로 마트에서 살 수 있는 게 과연 얼마나 될까. 우유 200ml가 800원을 육박하는 상황이니 말 다했다.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데 월급은 그대로이거나 깎이는지라 이 땅의 수많은 서민들은 장보기가 두렵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자(18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3면에 실린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단아하게 머리를 묶은, 전형적인 한 대한민국 주부는 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 애절한 눈빛으로 말한다. “지갑은 얇아지는데 물가는 불안해서 걱정이다. 만원 한장 갖고 벌벌 떨면서 선뜻 손이 안 나간다”고 하신다. 공감 100%다.

▲ 18일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3면에 실린 광고
하지만 이 광고는 보는 이로 하여금 무엇인가 속이 뒤틀리게 하는 ‘불편함’을 넘어 ‘역겨움’까지 선사한다. 이 주부는 호소한다. “살림도 어려운데, 한미FTA 빨리 비준해주세요!” 오른쪽 상단을 보니 ‘자유무역협정 국내대책위원회’(http://fta.korea.kr/)가 실은 광고다. 쉽게 말해서 정부가 낸 광고다. 광고의 하단에는 “경제위기 극복 ‘한미FTA 조기비준’이 해법입니다”는 문구가 박혀 있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보완책 마련을 위해 의견을 수렴하고, 전방위적 FTA추진에 상응하는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구성됐다”는 자유무역협정 국내대책위원회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박진근 한국경제학회 회장을 공동 위원장으로 한다.

정부위원으로는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 최시중 방통위원장,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등이 있고 민간위원으로는 장대환 한국신문협회장, 이희범 한국무역협회장,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이 있다.

이 위원회는 한미FTA 찬성 논조의 조선·동아 외에 네이버에도 같은 내용의 광고를 실었다. ‘애절함’을 호소한 신문광고와 달리 배너 형태의 포털 광고는 좀더 발랄하고 집요하다. 검색창 바로 밑의 배너 광고라 눈에도 잘 띈다.

이 광고는 포털에 접속한 이들에게 “요즘 힘드시죠?”라고 묻는다. ‘아니다’라고 말할 사람 한 명도 없겠다. 이같은 심정을 대변하며 수출업계에 종사하는 한 직장인은 “수출량이 줄어서 너무 힘들어요”라고 울며 말한다. 이때 해답(?)이 뜬다. ‘한미FTA가 되면 수출이 늘어나서 경제가 활발해집니다.’

또다른 직장인이 말한다. “실물경제도 어렵고 금융시장도 어려워요.” 또 해답이 제시된다. ‘한미FTA가 되면 외국인투자가 늘어나고 무역수지가 좋아집니다.’

학사모를 쓴 한 학생은 “졸업 후에 취업하기 너무 힘들어요”라며 울어댄다. 또다시 ‘한미FTA가 되면 기업환경이 개선되고 일자리가 증가합니다’라는 해법이 뜬다.

이 광고는 이전에 등장했던 직장인과 학생들이 모두 모여 웃으며 “한미FTA 빨리 비준해주세요”라고 외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한미FTA 비준을 빨리 할수록 국민혜택은 더욱 커집니다’는 문구가 뜬다. 이 광고만 보면 마치 한미FTA가 우리의 구세주이자 요술상자인 것만 같다.

▲ 네이버에 실린 한미FTA 비준 촉구 광고
‘한미FTA’를 경제위기의 해법으로 꼽는 방식은 단순하면서도 교묘하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다름아닌 한미FTA 같은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이 광고는 원인을 해법으로 환원해버리는 놀라운 상상력을 과시한다. 지금 물가가 뛰고 있는 것은 고환율 정책 등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이 주요 원인이다. 그런 점에서 이 광고는 원인 제공자가 상상의 적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지능적인 프로파간다이기도 하다.

또한 신자유주의에 과도하게 경도된 정부가 재벌집단의 ‘사익’을 평범한 시민들의 바람으로 바꿔치기했다는 점에서 교묘한 포장술이다. “수출량이 줄어서 힘들다” “금융시장도 어렵다”며 울어대는 직장인들에게 한미FTA는 결코 해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미FTA로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되면 평범한 직장인으로서는 노동의 유연화로 인해 고용 불안정에 직면할 확률이 높다.

최근 몇년 사이 한국경제는 수출이 증가해도 고용은 정체되고 성장과 투자는 한계에 봉착했다. 짧게 말하면 ‘고용없는 성장’이다. 한국 수출을 주도하는 전기·전자 업종이 소재부품 산업의 발전을 동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IMF 이후 완전개방 단계에 진입했던, 대표적 서비스 산업인 금융업은 또 어떠한가. 공적자금 투입으로 정부가 대주주인 우리금융지주 소속 은행과 일부 지방은행을 제외하고 국내 주요은행 거의 전부가 사실상 외자지배체제에 편입됐다. 이로 인해 일부 수익성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긴 했으나 △국민경제 성장잠재력 약화 △금융주권 상실 △투기자본에 의한 상시적 국부유출 △조세포탈 등의 문제가 생겨났다.

“수출량이 줄어서 너무 힘들다” “금융시장도 너무 어렵다” “취업하기 너무 힘들다”고 말했던 직장인과 학생에게, 한미FTA 체결로 인해 자동적으로 고용이 확대되고 성장이 촉진된다고 예단할 근거는 희박하고, 한미FTA로 그들이 웃게 될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다면, 이 광고를 정반대로 뒤집는 패러디만으로도 충분하다. “살림도 어려운데, 한미FTA 비준만은 막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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