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언론사는 어디였을까? <시엔엔>? <폭스뉴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아니다. 미국 언론사들은 이렇다 할 재미를 못 봤다. 카타르 민영방송인 <알자지라>와 영국의 권위지 <더 가디언>이 최대 수혜 언론사였다. 침략이 시작되자 미국 언론들에서는, 평소 그들이 표방해온 객관주의의 얇은 지각을 뚫고 애국적 저널리즘의 불기둥이 분출했다. <알자지라>와 <더 가디언>은 전쟁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시청자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더 가디언이야 워낙 이름값 높은 영어 매체였으니 그렇다 쳐도, 알자지라는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였다.

▲ 한겨레 17일치 17면 기사. 이라크인들이 왜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분노하는지를 다뤘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손으로 시작한 전쟁을 차마 끝마치고 싶지 않았던지, 임기 말년에 이라크로 날아가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연설을 하다 “전쟁은 끝났다. 이건 이라크인이 보내는 이별 키스다. 이 개놈아”라는 욕설과 함께 신발 투척 세례를 받았다. 신발을 던진 이는 문타다르 알자이디. 그는 <알바그다디야> 소속 기자다. 공교롭게도 이 언론사 또한 아랍계 민영방송이라고 한다. 미국이 벌인 이라크 침략전쟁의 미디어사는 그렇게 알자지라로 시작해 알바그다디야로 끝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은 우연의 결과일 수 있지만, 혹 진실을 기록한 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집단적 기억’일지도 모른다.

지난 16일 서울에서 발행되는 종합일간지들에 이 사건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4대강 정비사업을 두고는 제각각 목소리를 내는 신문들이 이 보도에서만큼은 대동소이했다. 그것은 외신 인용보도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기는 하다. 뉴스원이 몇몇 외신으로 한정되다 보니 한국언론의 국제기사라면 으레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는 한국언론들이 이 사건을 가십거리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해외토픽’ 같은 가십기사에 분석과 관점이 반영되는 일은 없다는 걸 상기해보라.) 언론들은 당일 현장상황을 있는 그대로 (객관화해) 스케치하고 있지만, 맥락적 기술이 아닌 일회성 해프닝(가십)으로만 다뤘다.

하지만 가십이라고 해서 관점이 없는 건 아니다. 교묘하게 데코레이션돼 있을지언정, 가십만큼 해당 언론의 관점이 짙게 반영된 기사 유형도 드물다. 그리고 그 관점은 대개 지배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기 마련이다. 지난해 한국언론을 핑크빛으로 물들였던 신정아 사건 보도의 본질은 권력형 비리 보도가 아니라 스캔들 보도였다. 특히 언론들은 중세 종교재판관처럼 신정아를 철저히 마녀로 몰아갔다. 그 관점이 포르노그라피의 시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문화일보의 신정아 누드 사진을 통해 극적으로 폭로됐다. 반면 변양균은 악마가 되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는 권력 남용이라는 근대적 사회윤리 규범만을 적용했다.

16일 ‘신발 투척 보도’의 관점은 다름 아닌 부시와 극비리에 동행한 미국 기자들의 관점이다. (알자지라의 급부상이 미국 언론의 애국주의적 일방 보도에 대한 반작용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국제사회에 유통되는 외신 보도의 대부분은 서방언론의 시각으로 구성된 것들이다.) 그들에게 이 사건은 더는 뒤뚱거릴 레임덕조차 남아있지 않은 자국 대통령이 봉변을 당한 기상천외한 가십성 사건이었을 것이다. 서방에서는 유력 정치인들이 계란 세례를 받는 ‘애교성 테러’가 가끔 있기에 더욱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부시는 거짓과 불의의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라고 절규하는 한 아랍 언론인의 맥락적 메시지는 묻혔다.

▲ 조선일보 17일치 21면 기사
이튿날인 17일 보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신발 투척 기자가 아랍의 영웅으로 급부상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한국언론과 그들의 뉴스원인 미국언론의 눈에 자이디 기자는 좌충우돌 독불장군이거나 잘해야 반영웅(안티 히어로) 정도로 비쳤을 것이다. 다만 전날과 조금 다른 건 언론들 보도 태도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서 특히 도드라졌다. (동아일보는 아예 관련 보도를 하지 않음으로써 이 사건을 일회성 가십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겼다.)

조선일보는 “(자이디 기자는) 매우 자랑하기 좋아하고 거만한 사람”이라는 쿠르드계 출신 학창 동료의 말을 모든 언론 가운데 유일하게 전했다. 그러나 이라크 주류와 쿠르드계가 적대적 관계라는 맥락은 언급되지 않았다. 자이디 기자에 대한 평판은 그 쿠르드인 한 사람의 말로도 충분할까? 조선일보는 “기자의 견해는 신발이 아니라 글로 표현했어야 옳다”고 했다는 이라크 공무원 하산 자라의 비판도 덧붙였다. 이라크 공무원이 “기자는 기사로써 말해야 한다”는 서방 언론의 직업규범까지 언급할 정도니, 이라크가 그새 제법 서방화됐는지도 모르겠다.

중앙일보는 여론면 ‘분수대’에서 2001년 신발폭탄 테러범이 법정에서 “나는 테러범이 아니라 이슬람 전사”라고 주장한 것에 빗대, 자이디 기자가 “나는 테러범이 아니라 이슬람 모욕 전문가”라고 주장할지 모르겠다고 비꼬았다. 그런데 “나는 테러범이 아니라 이슬람 전사”라는 주장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뉘앙스 아닌가? “나를 살인자가 아닌 포로로 대해 달라.” 안중근 의사가 일제 법정에서 했던 진술 말이다. 가십 보도는 보도 대상을 희화화하는 경향이 있다. 중앙일보는 안중근 의사와 자이디 기자, 그리고 그들을 영웅시하는 한반도와 아랍의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희화화한 셈이다. 그렇다면 진짜 모욕 전문가는 누군가?

▲ 중앙일보 17일치 31면 기사
17일 보도를 보니 자이디 기자는 팔과 갈비가 부러졌고, 외국 국가원수 모독죄로 기소되면 2~7년형을 선고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관타나모 기지로 압송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그나마 안도했다. 그의 소속사인 <알바그다디야>는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아랍권 각지에서 날아든 지지 메시지를 내보내는 한편, “미국이 이라크 국민에게 약속한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에 걸맞게 그를 석방하라”고 성명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보도를 접하며, 내 머릿속에서는 2008년 한국 언론계의 풍경이 겹쳐졌다.

이라크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사에 대한 감사원 표적 감사를 보도했던 KBS에 주의 처분을 내린 것처럼 알바그다디야에 “자사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방송했다”며 주의 처분을 내릴까? 아니면 쾌청한 날씨에 기상 캐스터가 검은색 옷을 입고 나와서 어처구니가 없었다며 시청자 사과방송을 결정했듯이, 제대로 닦지 않아 냄새나는 신발을 던져 어처구니가 없었다며 시청자 사과방송을 결정할까? 이걸 보고 이라크 공무원 하산 자라는 “기자는 신발이 아니라 글로 표현해야 했다”며 박수를 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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