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권 침해’ 주장에 대해 기자들에게 사과한 KBS 보도본부 한 간부가 평기자로 발령났다.

지난 17일 <기자협회장의 특정기사 보도 요구는 명백한 ‘편집권 침해’이다>라는 성명에 이름을 올렸던 임장원 경인방송센터장은 21일, 기자들만 열람할 수 있는 보도정보시스템에 사과글을 올렸다.

임장원 센터장이 쓴 글에는 ‘기자협회장의 발언을 압력으로 느끼지 않았음에도 서명에 참여한 것이 부끄럽다’며 ‘공정하고 균형 잡힌 보도를 지향한다면 기자협회장의 목소리를 소중하게 여겨주시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는 부끄러움을 안고 부서장 역할을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이미 김인영 보도본부장에게 거취에 대한 생각을 말씀드렸고 순리에 맞게 처리하실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글을 올린 지 하루 만인 22일, KBS는 임장원 센터장을 경인방송센터 소속은 유지하되 평기자로 인사발령조치했다. 신임 경인센터장은 이정록 기자가 맡았다. 임장원 센터장은 휴가를 신청했으나 이조차 반려된 채 이례적으로 빠른 인사조치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토론과 논의 없이 ‘입 다물라’는 집단 성명, 절망스럽다”

KBS는 “방송사업자는 방송프로그램 제작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취재 및 제작 종사자의 의견을 들어 방송편성규약을 제정하고 이를 공표하여야 한다”는 <방송법> 제4조 4항에 따라 KBS <방송편성규약>을 만들었다. KBS기자협회장은 ‘취재 및 제작 종사자’를 대표해 보도본부 아침 편집회의에 참석하고 의견을 제시해 왔다.

KBS 메인뉴스에서 세월호 청문회 이틀 동안 1개의 단신만을 내보낸 상황에서 마무리 보도를 하자는 기자협회장의 제안에, 보도본부 간부들은 “편집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구체적인 뉴스를 9시 뉴스에 채택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아이템 선정 문제는 협회장이 간섭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방송법>과 <방송편성규약>이 보장하고 있는 ‘제작 실무자 대표’의 발언권은, 20여명의 간부들이 “부담스런 압력으로 인식했다”는 이유로 무시되고 있다. (▷ 관련기사 : 세월호 청문회 보도 요구가 ‘편집권 침해’라는 KBS / KBS 보도국 간부들 “특정 기사 보도 요구는 명백한 편집권 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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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본부 간부들의 ‘편집권 침해’ 성명이 나온 17일 이후, KBS 내부는 토론과 논쟁으로 시끄러운 상태다. 간부들로부터 공개적으로 발언권을 부정당한 KBS기자협회(협회장 이병도)는 21일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라는 성명을 내어 “KBS가 세월호 청문회를 세심히 확인, 보도하는 일은 재난방송 주관방송사로서 본연의 책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일”이라며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않은 대로, 왜 그런 것인지에 대한 분석 보도도 필요하다고 본다. 협회장의 제안은 이런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고,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런 문제제기는 충분히 합리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었다”는 점을 재차 확인했다.

KBS기자협회는 “협회장의 제안에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토론하고 논의하면 될 일이지 ‘다음부터 입을 다물라’는 집단 성명서로 대응할 일인지 여전히 의문이다. 사실은 절망스럽다. KBS 기자 사회가 서로 간의 의견 제시와 토론, 치열한 논쟁을 어쩌다 이토록 백안시하게 됐나”라며 “폐쇄적 소통 문화가 우리 조직의 발전과 뉴스 경쟁력 제고에 얼마나 해로운 요인이 되는지 국·부장단은 정말 모르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기자협회는 평기자들이 인준하는 사실상의 유일한 소통 창구이며, 협회장은 그런 소통의 역할을 자임하고자 협회원들에게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우리들의 대표”라며 “국·부장단이 하루빨리 성명서에 적힌 기조를 철회하고 열린 마음으로 기자협회장의 정당하고도 합법적인 역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앞서 KBS기자협회는 지난 18일 회의를 열어 △기자협회장이 KBS <편성규약>에 따른 제작 실무자 대표임을 확인 △기자협회장이 편집회의 등에 참여해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평기자의 당연한 권리임을 확인 △국·부장단의 편집권 침해 주장은 <편성규약>이 보장하는 제작 실무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규정 △기자협회장 의견제시 막는 행위 재발 시 총회 개최 등 모든 대응수단 강구 △최근 일련의 사태와 KBS 보도에 대한 보도위원회 개최 정식 요구 등 5가지 사항을 의결한 바 있다.

“평기자 대표 무시하고 공정방송 노력에 어깃장 놓는 태도”

KBS 기자들도 사내게시판에 비판 기조의 글을 줄지어 올리고 있다. 현재 방송기자연합회장을 맡고 있는 손관수 기자는 보도본부 간부들의 주장에 대해 “소통을 이야기하면서도 너희들과는 소통하지 않겠다는 배척의 목소리와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손관수 기자는 △특정 기사라는 표현 △KBS기자협회가 아니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이하 새 노조)가 성명을 낸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 △편집권 침해라는 표현 등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월호 청문회 기사화 요구가 어떻게 ‘특정 기사 요구’인가. 당일 발생한 가장 큰 현안과 관심사 중 하나에 대한 리포트 제안을, 마치 기사가 안 되는 걸 억지로 기자협회장이 요구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왜곡된 수사”라며 “우리 사회가 엄청난 에너지와 자산을 쏟아부어가며 만들어 낸 귀중한 합의와 이에 따른 청문회를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 KBS만큼은 더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았을까”라고 반문했다.

이어, “KBS 노사 간 이뤄지고 있는 공정방송위원회의 노측 대표로는 KBS노조나 새 노조 공추위 간사가 대표로 참석하고 사측에선 보통 보도국 취재주간이 참석해 보도의 공정성과 정치적 독립성, 보도에 영향 준 외압이 있는지 여부를 따진다. 공적인 자리에서 기자협회장 제안을 무시하고 ‘당신이 그럴 말할 자격이 있느냐’고 공격한다면 노조는 당연히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정말 기자협회장 발언이 편집권 침해라고 생각된다면 보도국 차원에서 먼저 공방위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럴 의향이 있는가”라고 맞받았다.

손관수 기자는 “보도국이 아닌 KBS의 다른 곳이나 정치권, 대기업, 시민단체가 이러쿵저러쿵한다면 편집권 침해라고 반박할 수 있겠으나, 언제부턴가 KBS이사회의 편집권 및 편성권 논란에 기자와 PD 사회가 끓는데도 (간부들이) 이에 적극 반박했다는 소리는 잘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그런데도 <편성규약>에 의해 부장단 회의의 엄연한 ‘한 구성원’인 기자협회장 발언에 모욕적인 딱지를 붙이는 것은 평기자 대표를 무시하고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공정방송 노력에 어깃장을 놓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기자들은 매일 요구하고 제안하고 어떤 땐 데스크에 항의도 하고 싸움도 한다. 다 기사 하나 제대로 써 보겠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고, 어느 데스크도 이걸 외압이나 압력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며 “보도국 국·부장단의 연대 성명은 ‘KBS 공정성과 독립성 저해행위’에 대한 반격이어야 하고, KBS를 자신의 발아래에 두려는 온갖 종류의 권력과 압력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진정한 외압을 향해 겨눠야 할 창끝을 후배들에게 돌리는가”라고 지적했다.

이병도 기자협회장 역시 “특정 아이템 선정 요구가 잘못된 관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협회가 주장해 온 편집권 관련 주장들의 순수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 등 국·부장단 성명 일부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짚었다.

이병도 협회장은 “면담 중 (보도)국장은 영국 BBC 사례를 들며 BBC에서는 에디터들이 아이템을 결정하지 평기자들은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시기에, ‘영국처럼 고도로 민주주의가 발전돼 이미 성숙해 있는 나라에서는 소통이 일상화돼 있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않은 과도기 상태에서는 평기자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협회장의 편집회의 참석과 의견제시가 과거 KBS에서 그렇게 시작됐고 지금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니 저의 의견 제시를 이해해 달라’는 취지로 말씀드린 것”이라며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기자협회장이 마치 편집회의 참석과 의견 제시가 잘못된 관행임을 인정한 것처럼 성명에 담은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 기자는 “세월호 청문회 관련 리포트를 9시 뉴스에서 1번도 안 한 것이 잘된 편집권 행사였다고 주장하는 건가. 한 두 사람의 판단도 아니고 최소 20년 이상 뉴스를 다뤄온 보도국 국·부장들이 회의를 거쳐서 결정한 게, 세월호 청문회가 9시 뉴스에 다룰 만한 뉴스가 아니었다고 하면 그 판단력을 존중받기 힘들 것 같다”고 일침을 놨다. 그러면서 “9시 뉴스 편집권은 보도국장이 대표로 행사하고 있지만 편집권은 뉴스 제작 종사자들의 총의를 담아야 한다”면서 “편집권을 마치 보도국 간부들만의 권한인 것처럼 쓰여진 성명에 대해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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