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때문에 1980년대를 돌아보는 게 유행처럼 돼버렸다. 이 유행은 언론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한다. 흔히 1980년대 정권의 여론정책을 ‘3S’(섹스‧스크린‧스포츠)로 특징짓고, 1987년 6‧29 선언으로 언론의 자유가 확립됐다고 이해한다. 정진석(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은 <한국언론사>(나남, 1995년)에서 1987년 이전까지 언론 상황을 ‘언론의 카르텔화’로 규정하고 “1988년 제6공화국이 출범하면서부터는 발행과 편집의 자유가 크게 신장되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정부기관원들이 언론기관에 일상적으로 출입해 자료를 제공하고 기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공공연하게 ‘언론계를 정화하겠다’고 했었다. 정권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했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정책은 이 같은 ‘통제’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당시 언론도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이 주류언론의 덩치를 키우면서 ‘통제’한 후과는 제6공화국에도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으로 국한해도 문제는 심각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언론통폐합을 단행했고, 문화공보부는 언론사에 매일 ‘보도지침’을 내려 언론을 통제했다(2015년 박근혜 정부가 신문법 시행령을 개정해 5인 미만 인터넷신문을 폐간시키고, 문화체육관광부에 언론사 보도국장과 편집국장을 직접 대면해 정부정책을 설명하는 직제를 신설한 것과 비슷한 전략이나, 그 강도에 있어 신군부 정권의 정책이 훨씬 강력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1980년대 신군부 정권의 언론통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보도지침’이다. 1986년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와 <말>지는 정부의 ‘보도지침’을 폭로했다. 정권은 보도 여부와 방향을 결정하는 지침을 내려 보냈다. ‘시위대의 폭력을 강조하라’는 지침도 있었다. 언론사들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 김주언 기자가 쓴 <한국의 언론통제>(리북, 2009년)에 따르면, 서강대 유재천 교수(신문학)는 당시 “여권신문의 경우는 보도지침 가운데 ‘보도 불가’는 약 96%, ‘보도요망’은 100% 반영된 것으로 나타났고, 비여권신문의 경우는 ‘보도 불가’는 약 67%, ‘보도요망’은 약 30% 반영됐다”는 분석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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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흐름이 6‧29 선언으로 일부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다. 선언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 관련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중략) 정부는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하여서도 아니 됩니다 언론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은 독립된 사법부와 개개인의 국민임을 다시 상기합니다.” 실제 1987년 6월 항쟁 이후 언론 판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시민들은 1987~1988년 호주머니를 털어 한겨레신문을 창간했다. 1987년 10월29일 한국일보를 시작으로 1989년 1월까지 전국 46개 신문과 방송사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언론노동자들이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을 만든 것도 1988년 11월 26일이다.

그러나 6‧29 선언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대한 압박은 계속됐다. <한국의 언론통제>를 보면, 1987년 9월 안전기획부는 ‘김대중 납치사건 관련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을 게재한 <신동아>와 <월간조선> 10월호의 발행을 중단시키기 위해 인쇄소를 ‘점거’했다. ‘발행의 자유’는 보장하되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은 과감하게 통제하고 압박하는 것이 제6공화국의 언론통제였다. 한겨레는 1989년 압수수색을 당했다. 당시 영장을 발부한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가 최성준 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다. 1990년 12월 경찰은 <말>지 1991년 1월호 2만여부를 제본소에서 압수하기도 했다.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렸기 때문이다.

저인망식 통제도 계속됐다. 채백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국언론사>(컬처북, 2015년)에서 “(6‧29 선언으로) 국가의 언론 개입이 전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며 “과거처럼 직접 개입하면서 권력의 의도대로 통제하는 것이 어려워졌을 뿐 다른 형태의 간접적 방식으로 정치권력은 여전히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시도하였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것이 ‘언론인 개별 접촉 보고서’다. 한겨레신문을 통해 공개된 이 보고서는 문공부 홍보정책실이 언론사별로 접촉 대상자를 선정해 개별 접촉하고 보도 협조 요청 사항을 전달한 내용이다. 이밖에도 ‘기관원의 언론 사찰’도 계속됐다. 언론노보는 1989년 11월 2일 언론사 담당 기관원 59명의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언론 지형은 제6공화국을 기원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1990년 당시 서울신문노조 공정보도위원회 간사를 맡은 강석진 기자는 언론노조 기관지인 <민주언론>을 통해 “1988년 이후 정권으로부터의 노골적인 간섭이 많이 줄어드는 한편 전체 노동운동이 고양됨에 따라 ‘땡전뉴스’ 등과 같은 희극은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정치‧사회‧경제‧북한 보도 등에는 독재와 냉전의 시대에 굳어진 편향된 보도태도가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최기표 언론노보 기자가 쓴 <6공 언론계의 실상과 허상>이라는 글을 보면, 당시 정부는 MBC와 KBS의 다수 프로그램에 개입했고 여러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방영불가’ 조치했다. 속된 말로 ‘한겨레 외에는 다루지 않는’ 문제들도 여러 건 있었다. 인쇄 중 기사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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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국사회와 언론>(아침, 1992년)에 “6공 정권의 언론정책의 기본목표는 언론자유의 창달이라기보다는 역시 정권에 순치되고 협조적인 언론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6공의 언론정책은 그 형식과 기교에 있어서는 대단히 세련된 것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효성 교수는 “현 정권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중대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언론사의 사주나 고위간부들과의 접촉을 통해 언론보도방향이나 논조를 통제해오고 있다”고도 썼다. 그는 6공 언론정책의 특징으로 대통령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의사사건(pseudo-events)’을 연출한 것을 들기도 했다.

요컨대 6‧29 선언 이후에도 정권의 언론에 대한 저인망식 통제와 ‘언론 산업화’ 정책은 계속됐다는 얘기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 결과들은 언론이 시장에서 경쟁하면서 ‘산업화’하면서 ‘권력화’했다고 평가한다. 1980년대 후반 시민들은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 순치됐거나, 여전히 기관원들과 정부부처의 ‘대면접촉’에 의해 포섭된 언론을 소비했다. 한편으로는 한겨레신문이 생기고, 언론사 내 노동조합 활동이 활발해지기도 했으나 지금과 같은 ‘기울어진 운동장’은 바로 제6공화국 때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응답하라 1988>의 ‘운동권’ 성보라(류혜영 역) 또한 주류언론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진실을 알아차렸을 터다.

언론이 처한 현실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고단하다. 1980년대와 제6공화국의 언론환경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땡전뉴스 대신 ‘땡박뉴스’가 생기고,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주요 언론사 ‘톱뉴스’가 된다. 과거 군부정부의 사전검열은 지금 언론의 자기검열(self-censorship)로 바뀌었다. 송건호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이 쓴 <한국현대언론사>(삼민사)라는 책에는 1961년 8월 4일자 미국 <타임>지가 한국 언론을 가리켜 “말하지 못하는 신문”이라고 평했고, 비슷한 시기 박정희 소장은 “언론인은 기개가 부족하다”고 비웃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시민들이 대안언론을 만들기 위해 모금을 하고 언론사 노동조합 활동이 활발하던 1980년대 후반, 정부의 언론통제에 기자 500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고 ‘정부에 협조한 신문을 보지 말자’는 구호를 외치던 1960년대가 오히려 지금보다 낫다고 판단하는 것도 시대에 역행하는 인식일까. 1980년대와 제6공화국 때 만들어진 ‘기레기’가 2015년 언론판을 쥐고 흔들고 있다. 언론이 다시 ‘독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군부정권 시절 만든 기레기를 소환했다. 1980년대 시민들과 달리 언론에 희망을 갖지 못하는 게 2015년 시민들이다. 이들은 소셜네트워크에 의존하며 정보를 얻고 공유한다. 언론이 설 자리가 줄고 있다. 1980년대보다 못한 2015년 언론이 처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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