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토하는 시인을 사랑한 1930년대 여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모단. 당시 대세 트렌드 가운데 하나이던 ‘모던 걸’을 뜻하는 <천변살롱> 속 모단은 사랑하는 남자가 더 이상 아름다운 시를 읊어주지 않아도 사랑하는 마음 하나는 변하지 않는 일편단심의 여자였다.

유랑극단에서 홀로 버려졌어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성에서 음악이라는 꿈을 피우기 위해 천변살롱에서 노래를 아낌없이 부르던 모단을 연기하는 호란은, 연습을 하는 가운데서 호란 자신과 모단이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이라든가 홀로 상경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에도 마음속에는 불타는 정열과 재능이 있는 모습, 노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는 모습, 사랑했던 남자가 모단을 떠났지만 그 남자가 마음에 맺혀 잊지 못하는 모단의 모습 가운데서 호란과의 공통점을 찾기 시작했기에 말이다. 음악극 <천변살롱>에서 모단을 연기하는 호란을 대학로에서 만났다.

▲ 음악극 <천변살롱> 모단 역 호란 / 사진 제공 문화기획 함박우슴
-2008년 이후 간만에 서는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무대 연기 가운데서 공백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무대 연기를 늘 동경해 왔다. 배우는 관객을 끌어들일 줄 아는 힘이 필요하다. 가수 역시 무대에 서기는 하지만 배우가 무대에서 뿜는 에너지는 어마어마하다. 배우로서 무대에 서는 기회가 허락된다면 항상 해보고 싶었다.

이전에 뮤지컬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내가 잘 못하나보다’ 하는 좌절감을 느끼고는 섣불리 무대에 서는 건 장르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해서 조심스럽게만 생각했다. 무대에 서지 않은 동안에도 늘 무대를 동경해 왔다.

2008년 <샤우팅> 이후 ‘다시는 무대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샤우팅>으로 무대에 오르는 가운데서 반성도 많이 해보고 무대에 접근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무대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마음을 접고 ‘가수라는 분야에만 몰두하는 게 맞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다른 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들어왔을 때도 고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변살롱>은 참기가 힘들었다. 정석적인 연극이나 뮤지컬이 아니라 뮤지컬과 연극 사이에 있는 음악극이라는 점이 ‘이 정도면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밴드도 무대에 올라와서 눈을 맞춰가며 힘을 보태줄 수 있다는 생각에 무대에 설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초반에는 ‘지난번 <샤우팅> 때처럼 월권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천변살롱>을 한 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1인극이라 애로점도 있을 법한데.

“다른 공연과 달리 밴드가 뒤에 있다는 점에 있어 심적으로 안정감을 제공받는다. <천변살롱>은 힘이 들 때 밴드를 흘긋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힘을 받는다. 10년 넘게 가수로 활동해왔다. 관객에게 기를 받기도 하지만 밴드에게 기를 받을 때가 많다. 1인극이라 힘이 들 수도 있지만 가수로 홀로 무대에 서 왔다. 혼자 관객과 소통하는 건 익숙하다.

그런데 <천변살롱>에서도 이런 식으로 소통이 많이 필요하다. 1인극이라 집중력이나 체력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여럿이서 하는 공연과 비교할 때 버거울 수도 있지만 익숙한 형식으로 연기 무대를 접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음악극 <천변살롱> / 사진 제공 문화기획 함박우슴
-이번에 발매된 신곡 <괜찮은 여자>는 트로트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노래다.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이번 신곡이 <천변살롱> 속 만요를 위한 ‘선행학습’이 되지 않았나 싶다.

“안 그래도 <천변살롱> 제의가 들어왔을 때 소속사 대표님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하우스나 보사노바, 어쿠스틱이나 라틴 음악을 많이 했지 <괜찮은 여자> 같은 트로트를 접한 적이 없었다.

새로운 콘셉트로 솔로곡을 잡은 다음에 <불후의 명곡>에 출연하며 1950-70년대의 노래를 불렀다. 옛 노래로 회귀하며 우리 옛 노래에 담긴 정서를 해석하던 와중에 <천변살롱>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다시 무대에 서도 될까 하고 망설일 때 소속사 대표님은 ‘작품을 하라는 계시가 아니겠느냐, 그동안 쌓은 역량이 무대에서 좋게 나타날 것 같다’고 저를 북돋워주어서 이번 작품을 하게 되었다.”

-자기가 만든 결과물에 대해 엄격하게 판단하는 ‘자기 검열’이 강하다고 들었다.

“자기 검열이 강한 스타일이라 데뷔 때부터 많이 힘들었다. 저 자신도 힘들지만 자기 검열을 하게 되면 관객도 불편해 한다. ‘퍼포머’로서는 절대로 가지면 안 되는 태도라는 걸 안다. 하지만 자기 검열에 대한 해법은 하나다. 저 스스로를 검열하지 않는 게 해법이 아니라 자기 검열을 이길 만큼 연습을 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안 되는 부분은 계속 연습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설사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 검열이 아니라 아쉬움으로 남게 된다. 이를 깨닫는 게 오래 걸렸다.

이를 깨닫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좀 더 뻔뻔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해왔지만 이런 생각이 들면 이런 생각이 드는 부분을 깊이 파고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 성실하게 연습하는 게 최고의 해법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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