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공연 작품에 관해 심오한 분석을 하고자 한다면 분석하는 사람에게 쉐마, 심리학으로 보면 도식의 틀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가령 <매트릭스> 같은 영화를 분석할 때에 우리가 자각하는 것이 진짜 현실일까에 관한 관념적인 분석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대개의 상업영화를 보면 심오한 도식의 틀이 필요하지 않다. 시큘라크르나 라캉의 정신분석 등으로 분석할 만한 상업영화는 가뭄에 콩 나듯 아주 가끔 보이기에 말이다.
대개의 상업영화의 경우 서사의 개연성을 보고 플롯의 미흡한 부분을 지적할 때가 많았지만 <대호>는 특별한 상업영화에 속한다. 조르조 아감벤, 혹은 오비디우스라는 쉐마로 해석이 가능한 영화이기에 그렇다.
대호에게 ‘산의 군주’, 산군이라는 호칭이 붙는 건 지리산에서 가장 큰 육식동물이라는 존재를 넘어서는, 영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감벤의 관점으로 본다면 대호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운 존재에 해당한다. 천만덕이 대호를 사냥하려 들지 않는 건 성스러운 존재를 인간의 영역으로 포획하려 들지 않는 ‘종교’적인 태도에 다름 아니다. 포수라는 인간의 영역과 대호라는 성스러운 영역은 철저하게 분리된다.
대호를 영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포획하기를 바라는 마에조노의 태도를 아감벤의 관점으로 본다면 ‘세속화’로 볼 수 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놓아두지 않고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 말미암아 성과 속이 ‘분리’된 것을 어떻게든 허물려는 태도가 마에조노의 태도, 세속화의 태도인 셈이다. 대호를 사냥하려 들지 않는 천만덕의 ‘종교’적인 세계관은, 어떻게든 대호를 사냥하려고 달려드는 마에조노의 ‘세속화’와 대조를 이룬다.
영화 후반부에서 대호가 조선 사람보다 일본군을 물어뜯는 빈도가 높다는 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일제 식민지라는 타락의 세계관을 응징하는 자연의 심판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인간에게 포획당하는 세속화에 맞서는 성스러운 동물 대호의 몸부림으로 해석 가능한 영화이다. <대호>는 상업영화로서는 독특하게 아감벤과 오비디우스로도 해석이 가능한 특별한 위치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 영화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