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덕선이 좋아해. 친구가 아니라 여자로 좋아."

택의 공개 고백. 정환의 동공 지진. 버라이어티 한쪽은 분명 전자였지만, 제작진이 시청자에게 주시할 것을 부탁한 장면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정환의 침묵이었습니다. 문득 겹쳐진 것은 <응답하라 1994>의 그림자 연출. 칠봉의 키스보다 키스 받는 나정을 지켜보는 쓰레기의 침묵이 더 카타르시스였던.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이미 한도를 초과한 치사량으로 대부분이 정신을 잃은 밤. 심지어 나정이조차 키스 당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 취하지 않은 사람은 칠봉이 하나뿐인 것만 같았죠. 취중진담을 넘어선 술김의 키스는 지금 칠봉이에게 가장 뜨거운 사람이 누구인가를 증명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진정한 카타르시스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키스보다 뜨거운 절정의 순간이 바로 그 뒤를 이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죠. 두 사람의 키스를 바라보고 있는 이 남자의 눈빛, 그게 바로 이날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순간 잠들지 않은 감정은 칠봉이 하나만이 아니었던 것이죠.

키스하는 두 사람에 집중하지 않고 카메라는 굳이 그 방의 감정을 체크합니다. 이미 거나한 술잔치에 정신을 잃은 새내기들은, 벌칙을 제대로 수행했는가를 체크할 경황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잠들어있는 아이들을 거슬러 올라가 카메라가 도달한 최후의 감정은 바로 다름 아닌 쓰레기의 눈빛이었죠. 그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두 사람의 키스신에 취기조차 물러나 버릴 만큼 그는 충격에 빠져있었습니다.

▲ tvN '응답하라 1994’
칠봉이의 키스신에 깔리던 가사의 대목. "사랑 그것은 엇갈린 너와 나의 시간들, 스산한 바람처럼 지나쳐갔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던 쓰레기의 눈빛과 교차되는 가사. "사랑 그것은 알 수 없는 너의 그리움. 남아있는 나의 깊은 미련들."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거야." 배경음으로 선택된 최용준의 아마도 그건은 바로 쓰레기를 향한 테마송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제작진이 이 부분까지 공들인 디테일로 완성했다면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군요.

택의 고백과 칠봉의 키스, 그리고 침묵한 정환과 쓰레기. 쓰레기의 숨겨진 감정선이 키포인트였던 <응답하라 1994>였기에 꾹꾹 억눌러야 했던 그의 감정은 고스란히 음악이 터지기 전 쿵-하는 효과음이 대신했습니다. 반면에, 적어도 시청자에게만큼은 오픈되어 있는 정환의 감정은 쓰레기가 못다 한 '쿵-'을 제대로 표현해주었습니다. 농담을 다큐로 받은 사람의 표정. 웃어넘기려다 굳은 채 젖어 들어가는 눈. 우정이든 사랑이든 무엇 하나는 내려놓아야 할지 몰라 급격히 찾아 들었을 상실감에 의한 우울. 그야말로 멘탈 붕괴의 형상화였습니다.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두 씬의 공통점은, 멜로드라마의 극치인 키스와 고백을 그저 거들 뿐으로 만들어버린 포커스 이탈입니다. 고백을 하는데도 키스를 퍼붓는데도 그들은 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제작진이 준비한 궁극적인 카타르시스는 지켜보는 자의 요동치는 심장 소리였으니까요. 쿵-하고.

그리고 이로써, 명실공히 택의 포지션은 여주인공의 '거쳐가는 남자'로서, 이제 그의 가능성은 제로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차피 절대반지를 가진 정환이기에. 백만 분의 일의 가능성이었다 해도 고백하기 전까지는 조금이나마 '혹시나?' 하는 지점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작진이 택의 고백보다도 정환의 멘탈 붕괴에 더 초점을 맞추는 순간 백만 분의 일의 가능성마저도 제로로 뭉개진 것입니다. 한 수 앞을 보는 승부사 택이 어차피 질 것이 뻔한 게임에 돌을 놓았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만큼이나 애처롭습니다.

덧) 오늘 방송에서 가장 슬펐던 장면은 택의 고백에 깔린 구슬픈 배경음악이었다. 세상에 첫사랑 고백이라는 인생의 가장 로맨틱한 순간에 장송곡 분위기의 배경음악이라니. 명백히 이 씬은 택의 설렘 따위 아랑곳없이 정환의 슬픔에만 포커스를 맞춘, 정환의 정환에 의한 정환을 위한 연출임을 도장 찍고 싸인까지 해서 공증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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