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폭력시위가 없었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것인 만큼 정부와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일부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시위는 정부정책을 보완하고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만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 / “수많은 시위대가 죽창을 휘두르는 장면이 전 세계에 보도돼 한국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혔다”
- 이명박 전 대통령

“이번 폭력사태는 상습적인 불법 폭력 시위단체들이 사전에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주도했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불법 폭력집회 종료 후에도 수배 중인 민노총 위원장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종교단체에 은신한 채 2차 불법집회를 준비하면서 공권력을 우롱하고 있다 (…) 특히 복면 시위는 못하도록 해야 한다. IS(이슬람 국가)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얼굴을 감추고서”
- 박근혜 대통령

집회·결사의 자유가 갈 곳을 잃고 있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한 헌법 제21조보다는, “복면시위 금지”, “폭력 시위엔 엄단”,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검거 시 특진”이라는 살벌한 말들이 더 실감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집회와 시위를 탄압하는 방법은 더 다양하고 치밀해졌다. ‘강경진압도 문제지만 과격시위도 문제’라던 주장은 ‘(다소 과잉진압이라고 보일 수 있다 하더라도) 불법 폭력 시위에 대한 공권력 행사는 정당하다’로 발전했다. 국민의 ‘목소리 낼 권리’를 점점 앗아가는 기조는 노무현 정부나 이명박-박근혜 정부나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 10년 전에도 ‘강경진압’은 존재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첫 해였던 2003년부터 경찰은 과잉진압 논란에 휩싸였다. 2003년 12월, 핵 폐기장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부안핵대위는 경찰이 주민들에게 폭언을 일삼는가 하면, 일부 부녀자들의 경우 상의가 올라가 몸이 드러나 보일 만큼 무리하게 연행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더구나 부안군 주민이 23000명인데, 52개 중대 6000여명의 경찰을 투입한 것은 지나치다고 꼬집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2년 후인 2005년 핵 폐기장 반대 시위에 대한 경찰의 진압이 ‘인권침해’였다며, 치료비 등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집권 3년차였던 2005년은 특히 더 많은 국민들이 신음하던 시기였다. 2005년 4월, 비정규직 법안 폐기 등을 촉구했던 민주노총 충북본부 총파업 때도 격렬한 대치 끝에 노동자와 경찰 양쪽에서 수십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불과 2~3m 거리에서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실명 위기에 처하거나, 근처로 피신하다 전·의경 대원들에게 집단 구타당하는 등의 사례가 있었다.

2005년 7월,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를 요구하는 ‘7·10 평화대행진’ 때에는 현장을 지휘했던 이종무 경무관(서울경찰청 기동단장)의 언사가 도마에 올랐다. 이종우 경무관은 “상체를 공격해 논밭으로 과감하게 쓰러뜨려 버려”, “논바닥으로 밀어버려”, “뒤로 물러서지마, 공격해” 등 전경대원들을 자극하는 말을 지속했고,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당했다. 이종우 경무관은 먼저 폭력 시위 양상을 보였다며 ‘부하 직원 보호’와 ‘임무 수행’ 차원에서 한 명령이라고 항변했다.

▲ 2명의 농민 사망자를 냈던 2005년 11월 15일 여의도 농민집회의 모습 (사진=오마이뉴스 이종호 기자)

2005년 11월 열린 여의도 농민대회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해 큰 충격을 줬다. 농민대회에 참석했던 전용철 씨는 뇌출혈로 사망했고, 홍덕표 씨는 중상을 입고 입원해 있다가 결국 사망했다. 인권단체 연석회의는 그 해 12월 열린 <2005 집회·시위에 대한 경찰의 폭력진압 보고대회>에서 △곤봉과 방패 사용 △넘어진 사람 공격 △폭언 및 폭행 △도망가거나 해산하려는 사람 공격 △신고된 집회 장소 침탈 △집회 해산 후 강제 연행 등의 경찰폭력이 있었다고 밝혔다. 여의도 농민대회를 지휘한 인물 역시 이종우 경무관이었는데, 경찰청이 스스로 폭행 사실을 인정함에 따라 그는 직위해제됐다.

인권위 또한 전용철 씨, 홍덕표 씨 두 사람의 사인을 ‘경찰의 과잉진압’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단순 가담자나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하거나 쓰러진 사람, 다친 농민들의 임시 응급처치 등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여성 및 노인들을 방패와 곤봉 등으로 가격한 행위가 인정된다”며 “현장을 지휘하던 기동단장은 해산절차도 이행하지 않은 채 시위대 검거 목적으로 경찰력을 투입했다"고 경찰의 진압 태세를 비판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공권력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되며, 공권력의 책임은 무겁게 다뤄야 한다”면서 “돌아가신 두 분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 아울러 위로의 말씀 드린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허준영 경찰청장 문책 요구에 대해서는 “권한이 없다”고 물러섰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폭력시위가 없었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것”이라며 집회 참가자에게도 책임을 돌렸다.

2006년 포스코 본사 점거농성을 지지하는 집회에 참여했다가 머리에 부상을 당해 뇌사상태에 빠졌던 하중근 씨가 사망했을 때에도, 인권위는 사인이 경찰의 과잉진압에 있다고 판단했다. 2007년 3월 한미 FTA 반대 시위 당시에도 경찰의 물리력 행사로 참가자 상당수와 취재기자 8명 등이 밟히고 방패, 곤봉 등에 맞는 일이 일어나 과잉진압 논란이 제기됐다.

▲ 2007년 3월 10일 열린 한미 FTA 반대 집회 (사진=연합뉴스)

이명박 정부 : 더 대담해진 국가폭력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국가에 의한 폭력이 더욱 ‘활성화’된 점이 특징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한 지 세 달도 채 되지 않은 2008년 5월, 돌아선 민심을 확인해야 했다. 국민들이 광우병 우려가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말고 식량주권을 지키자며 촛불을 들고 나온 까닭이다. 한 번 타오른 촛불은 100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수천여명 수준의 경찰병력을 투입하고, 전경버스로 통행을 막으며, 물대포를 쏘는 집회 대응의 공식(?)은 이때 자리 잡았다. 당시에도 경찰은 경고방송도 없이 곡사(포물선을 그리게 곡선으로 쏘는 것)가 아닌 직사로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살수했다. 87년 민주화 항쟁을 기념하는 6·10 촛불 집회에는 그 유명한 ‘명박산성’이 등장했다. 집회 참가자들이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광화문 네거리에 거대한 컨테이너 장애물을 세워둔 것이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대치는 격렬해지고 부상자가 느는 등 피해 상황이 커지자 급기야 경찰청 인권위원 전원이 사퇴했다. 국제앰네스티도 “촛불집회가 전반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됐음에도 물대포와 소화기 등 비살상 군중 통제장치가 남용됐다”고 우려를 표했으나 경찰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촛불이 한창이던 6월 3일 어청수 경찰청장은 “무저항 비폭력 시민이 아니라 폭력 시민(이라 과잉진압한 것)”이라고 말해 빈축을 샀다.

2009년 1월 20일 벌어진 용산 참사는 이명박 정부 당시 행해진 국가폭력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경찰이 서울 용산구 철거민들을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특공대 소속 김남훈 경장과 철거민 5명 등 총 6명이 숨지고 24명이 다쳤다. 철거민들이 과격하게 대응한 측면도 있으나, 경찰이 시너, 염산, 화염병 등이 있어 화재의 위험이 높다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특공대를 동원해 무리하게 진압한 것이 결국 화를 불렀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용산 참사 직후 민주당 싱크탱크 민주정책연구원, 리얼미터, SBS가 각각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경찰의 과잉진압이 원인이었다는 응답이 55.4%, 55.1%, 58.1%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해 국민장이 치러졌던 2009년 5월 역시 경찰의 강경진압 모드가 입길에 올랐다. 서울광장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버스를 빈틈없이 세워두는가 하면, 색소 분사기를 발사해 이를 근거로 연행에 나섰다. 2009년 7~8월 이루어진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진압도 큰 상처를 남겼다. 거의 모든 건물을 장악한 경찰특공대원은 최루액을 뿌리고 테이저 건(시위 진압용 전기총)을 쏘는 등 더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곤봉과 방패를 이용한 구타도 빠지지 않았다.

2011년 11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크레인 위에 올라간 김진숙 씨를 응원하기 위해 희망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경찰의 봉쇄로 만남은 불발됐다. 살수차와 스프레이 최루액이 등장했고 수십여명이 무더기로 연행되기도 했다. 같은 달 한나라당의 한미 FTA 비준안 강행 처리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도심 집회를 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대포 살수와 시위자 연행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2012년 4월에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설립을 반대하던 문정현 신부가 해경과 실랑이를 벌이다 7m 아래로 추락해 크게 다치기도 했다.

▲ 위쪽부터 용산참사 관련 설문조사 결과를 보도한 2009년 1월 24일 SBS <8뉴스>, 쌍용차 노조 강제진압이 진행된 2009년 8월 5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박근혜 정부 : 시위대는 국민이 아니다? 정부, 폭주하다

박근혜 정부 역시 임기 첫 해부터 대규모 집회를 맞닥뜨려야 했다. 더구나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한 원동력이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이라는, 정권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사안이어서 타격은 더 컸다. 국가기관의 조직적인 선거 개입 정황이 잇따라 포착되었던 2013년 6월, 시민들은 철저한 국정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며 주말마다 광장으로 나왔다. 대부분의 집회가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돼 대체로 평화적인 분위기였으나, 크고 작은 대치는 있었다. 행진을 막다가 경찰과 시민들이 몸싸움을 하거나, 진압 과정에서 나타난 최루액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제50회 한국보도사진전 spot news 가작이 바로 ‘최루액 맞은 고교생’이었다.

2013년은 쌍용차의 대량 정리해고 시도가 위법했다는 고등법원의 판결이 나와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진 때이기도 하다. 2013년 3월, 해고의 충격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대한문 분향소가 생기자 중구청은 행정대집행에 나섰고, 아예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대한문 주변을 화단으로 만들어버려 비난 여론이 높았다. 인권위가 경찰이 쌍차 노동자들의 대한문 집회를 방해하고 있다며 긴급구제를 결정했고, 서울행정법원도 “쌍차 집회가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할 근거나 자료가 없다”며 경찰이 낸 제한통보처분에 ‘효력정지’를 내렸으나 경찰의 집회 방해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충돌 상황에서는 여전히 최루액이 등장했다.

그 해 정부는 사상 초유의 ‘민주노총 침탈 사태’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기도 했다. 2013년 12월,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며 총파업에 나선 철도노조 지도부를 강제 구인하겠다는 명분 아래 경찰은 민주노총 사무실이 있는 경향신문사 건물에 강제 진입했다. 차벽트럭 18대, 물대포 5대, 물 보급차 5대, 방패차 5대, 방송 조명차 6대, 위생차 7대, 견인차 1대, 소방차 3대, 구급차 1대 등 차량 54대와 경찰관 20개, 의경 31개 등 총 51개 부대가 동원된 ‘대규모 작전’이 펼쳐졌다.

▲ 2013년 12월 22일, 박근혜 정부는 민주노총이 합법화된 이래 처음으로 민주노총 건물을 침탈했다. (사진=연합뉴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은 1년 만에 진압 대상이 되었다. 2015년 4월, 특별법을 무력화시키는 시행령을 반대하고 참사 1주기를 기리는 추모 집회가 열리자 경찰은 차벽을 설치하고 최루액과 물대포를 뿌리며 헌화조차 막았다. 광화문 일대를 중심으로 겹겹이 쌓인 차벽에 ‘근혜산성’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무엇보다 정부책임이 큰 국가적 참사로 피해 입은 유가족을 ‘적’으로 간주해 공격하기 시작한 점은, 정부의 ‘분리 정책’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국제앰네스티는 “경찰이 불필요한 경찰력을 사용해 세월호 유가족을 해산하려 한 것은 모욕적 처사”라고 꼬집었다.

민주노총을 겨냥한 공권력 행사의 강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지난 9월 정부의 노동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민주노총 총파업 대회가 열렸을 때, 경찰은 방패로 밀치고 마구잡이로 최루액을 쏘았으며 경찰 진압에 강력 항의한 시민들을 줄줄이 연행하는 등 ‘도 넘은’ 경찰력 집행을 보여줬다. 심지어 경찰은 총파업대회 취재 중이던 기자들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는데도 목을 조르고 무작정 연행하려고 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및 노동개혁 등을 반대하는 11월 14일 민중총궐기는 정부 ‘폭주’의 정점이었다. 본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신고된 집회 구역을 차벽과 경찰버스로 막아 집회 자체를 ‘불법’으로 만들었고, 경고 방송 한 번 없이 약 3시간 동안 물대포를 쏘았다. 특정 대상을 직접 조준하는 것은 물론, 물대포를 맞아 쓰러진 시민에게도 몇 초 간 더 살수를 계속했으며, 부상자가 실린 구급차에까지 물줄기를 뿌렸다. ‘밥쌀 수입 반대’를 외치며 전남에서 올라온 농민 백남기 씨는 물대포 피해로 3주 가까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 세월호 추모 1주기 집회가 열렸던 올해 4월 18일, 광화문 광장에는 차벽이 등장했다. ⓒ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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