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움직임에 민감한 기업들이 권력과 이런(끈끈한) 관계인 단체의 후원 요청을 예사 후원금 안내장처럼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무슨 세금고지서처럼 받아들였을 게 뻔하다. 괜히 모른 체했다가는 나중에 무슨 탈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가 해서 다른 데 쓸 돈을 당겨서라도 후원금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뉴라이트 계열 단체들은 지난 정권 사람들이 ‘국정 파트너’라고 부른 참여연대가 2006년 4월 기업 상대로 후원금 모금 초청장을 보냈을 때 ‘기업들이 정부와 코드가 같은 단체엔 알아서 돈을 갖다 바친다’ ‘고단수 앵벌이 아닌가’라며 비판했었다. 다른 단체가 기업에 손 벌리는 건 안 된다고 하면서 자기는 해도 괜찮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한겨레>나 <경향>의 사설이 아니다. 바로 <조선일보>의 지난 12일자 사설이다.

이에 대해 뉴라이트전국연합은 15일 ‘후원행사에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라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해, 조선일보를 ‘좌우분간조차 모르는 보수매체’라고 지적하며 “타인에 대한 이해나 배려없이 자신들의 잣대로만 재단하려는 무모함은 시민단체에 대한 걱정과는 거리가 먼 이기심과 오만일 뿐”이라고 맞서고 나섰다.

▲ 조선일보 12월 1일자 사설(왼쪽)과 12일자 사설
조선일보의 이 사설은 경향신문의 13일자 사설 “3년 전 정치판의 ‘뉴 인프라’ 구축을 내걸고 출범한 뉴라이트전국연합은 당시만 해도 수구·무능 세력으로 각인된 ‘올드 라이트’의 대안으로서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지방선거나 지난해 대선 등 정치의 계절을 보내면서 한나라당의 전위대라는 본색을 드러냈다. 그런 맥락에서 시민·사회단체라는 미명하의 후원금 요청은 정권을 등에 업은 채 기업에 손을 벌리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올드 라이트’의 복제품을 보는 것 같다”와 착시를 일으킬 정도다.

조선일보는 그동안 어깨를 같이 걸어왔던 ‘동지’격인 뉴라이트를 비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조선일보는 지난 1일자 사설 ‘뉴라이트, 이제 생각과 행동을 바꿀 때다’에서도 “보수주의 운동 세력은 정권 교체가 중요해서 선거 때 힘을 보탰다 해도 이제는 정권과 거리를 두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렇게 가면 노무현 정부 때 정권의 외곽부대로 나서서 일이 있을 때마다 맹목적 정권 지지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노사모’ 집단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 보수가 1980년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30년 가깝게 미국을 주도한 것은 1964년 대선에서 골드워터 공화당 후보가 참패한 뒤 싱크탱크를 만들어 정책을 개발하고 행동단체들이 학생과 시민을 교육하는 데 힘쓴 덕분이다. 뉴라이트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이끄는 주역이 되고 싶다면 이제 생각과 행동을 바꿔야 할 때”라고 요구했다.

조선일보는 13일자 30면 ‘시론-‘뉴라이트’를 넘어 ‘프로콘’으로’에서도 “규모 면에서 가장 큰 행동주의 분파(뉴라이트전국연합)가 공공연히 이명박 정부와 길을 같이 하면서 뉴라이트가 사상운동이나 정책운동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대폭 좁혀놓고 말았다”며 “이 점에서 ‘정치화된 뉴라이트’는 이제 종언을 선언할 때가 온 것 같다”는 김일영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의 주장을 싣기도 했다.

‘10년만에 등장한 보수 정권’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나타난 이명박 정부는 집권한 지 1년도 안됐지만 부자를 위한 감세정책, 교과서 편향 문제, 한반도 대운하, 언론장악 등 정책 전반의 실책 탓에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졌다. 지난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얼미터’가 주간정례조사를 한 결과 정부가 국정수행을 잘못했다는 의견도 61%에 육박했다. (12월 8일부터 9일까지, 전국 19세 이상 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7%포인트)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일보가 “이대로 가면 보수는 망한다”는 판단을 하고, ‘조선일보-이명박 정권-뉴라이트’로 이어지는 3각 구도에서 뉴라이트를 들어내려고 한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정색하고 이명박 정권과 선을 그을 수는 없으니, 정권에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뉴라이트를 약한 고리로 삼아 더는 힘을 실어주지 않겠다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조선일보의 이런 위기의식은 최근 보수 진영 곳곳에서 빈번하게 목격된다. 최근 대표적인 보수 학자인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보수가 해방 후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면서 나름의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대한민국을 끌어갈 미래세력으로는 대단히 미흡하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 성찰, 자기개혁 그리고 대안제시 등이 뉴라이트 운동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이들의 대열에 계속 잔류했다가 3, 4년 뒤에 무슨 ‘뒷감당’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판단이 서면 더욱 확실하게 발을 뺄 가능성도 있다. 민언련 김유진 사무처장은 “정권 탄생의 1등 공신인 조선일보가 정부의 실정에 대해 교활하게 책임 떠넘기기를 하고 있다”며 “일방적 친정부 보도를 통해 작금의 상황을 초래해놓고 사회적 비전과 전망도 내놓지 못하는 조선일보는 뉴라이트에 대해 잘한다 못한다 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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