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할 수밖에 없는 세상. 그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들이 필요하다. 철저하게 현실에 묻혀 자신을 투명인간화 하거나, 적극적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 물론 그 중간 어디에서 적당하게 시류에 편승해 이리저리 휩쓸리는 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분노하지 않는 삶에서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알에서 깨어난 이수인;
분노하라고 외쳤던 스테판 에셀, 그는 떠났지만 세상은 분노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스테판 에셀은 2013년 2월 27일 95세로 숨졌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그는 노년의 나이에도 젊은이들에게 분노하라고 했다. 분노하지 않고 침묵하는 동안 괴물들은 더욱 거대하고 강력한 괴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푸르미 마트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더욱 경악스럽다.

여당 대표라는 자가 노조만 없었으면 대한민국이 벌써 선진국이 되었을 것이라는 막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내는 것이 바로 2015년 현재의 모습이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자가 노조의 부당함을 외치고, 노동자를 사지로 몰아넣는 노동법 개정이 시도되는 현실은 <송곳>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작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노사 관계 이야기는 그저 꾸며낸 일이 아니라 현실의 이야기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웹툰은 그저 손쉽게 보는 만화라는 인식을 바꿔놓았다. <미생>과 함께 우리의 삶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는 <송곳>은 제목처럼 날카롭기만 하다. 노조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이들이 노조에 가입하면서 역할과 책임을 배워가며 느끼는 힘겨운 투쟁의 역사는 곧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 JTBC 특별기획 '송곳'
우리 사회는 여전히 노조가 부당한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 <송곳>은 노조란 그런 부당한 존재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본점 사무국장의 이야기는 더욱 안타깝고 답답하면서도 뭉클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이 지독한 현실에서 가장 마지막에 의지하고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노동조합이었다고 말한다.

남편을 잃고 마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녀는 악착같이 일을 했다. 조금만 잘못해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도 노동자들은 그곳에서 사라져야 했다. 아무런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그 노동자들은 그렇게 일자리에서 떠나야만 했다. 그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그녀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점심 역시 화장실에서 빵으로 급하게 때우며 일에만 집중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배신 외에는 없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준 마지막은 결국 노조였다. 남편도 없는 그녀에게 노조는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희망을 위해 그녀는 노력했지만 여전히 현실은 팍팍하고 힘들기만 하다. 그렇게 버텨왔지만 노조는 임금협상에서 겨우 1% 인상안을 내놓고도 무너졌다. 사측은 그런 노조의 요구도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파업을 조장하고 이를 통해 파업에 나선 모든 이들을 붕괴시키면 간단하게 노조를 파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측의 행동은 결국 그들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모두 각자의 권리가 있듯 노동자 역시 자신이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하고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경제가 위축되고 힘들다고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재벌들은 엄청난 자산을 축적해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생은 뒷전이고 위정자들이 나서서 재벌들의 앞잡이가 되어 사측이 원하면 언제든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도록 법을 바꿔주려는 현실은 두렵기까지 하다.

▲ JTBC 특별기획 '송곳'
파업을 준비하며 이수인은 구고신이 아닌 주 소장을 소개받는다. 구 소장과는 전혀 다른 주 소장은 철저하게 파업을 위한 파업에 집중한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고 큰 흐름 속에서 푸르미 마트 일동점도 그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대한 노조를 움직이는 존재로 다가온다.

푸르미 마트가 총파업을 앞둔 상황에서 논란은 더욱 심화된다. 뒤늦게 노조에 참여한 이들과 기존 노조원들 사이의 균열은 혼란을 이끌었다. 노노갈등은 당연하게도 사측이 노동자들을 붕괴시키는 방식 중 하나이다. 노조를 파괴하는 확실한 방법은 내부자들끼리 싸우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과 지위로 그들을 흔들어 서로 적이 되도록 만든다.

그들이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파괴하려는 이유는 단순하다. 노동자들을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조의 결성은 곧 자신들의 그 모든 부도덕함이 약점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파업 첫날 대체 노동자로 채워 놓은 사측. 그리고 대체 노동자들에게 분노를 폭발하는 노조원들. 이를 막아보려 노력하는 이수인이지만 역부족이다. 착해서는 결코 이 상황을 제대로 해쳐나갈 수 없는 현실에서 이수인이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여 부장에게 귓속말로 욕을 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이수인은 그를 비판하는 이들까지 걱정하는 존재였다. 구고신보다 더 철저하게 타인을 존중하던 이수인이, 귓속말이기는 하지만 욕을 쏟아내는 모습은 분명한 변화다. 그렇게 그는 변신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결코 그 진흙탕 싸움에서 이길 수 없음을 그도 느꼈기 때문이다.

군 시절 자신을 길들이려는 병사들과 싸우던 그는 착각했었다. 어느 순간 자신에게 찬사를 보내고 군내 문제도 모두 사라지는 듯한 모습에 이수인은 행복했다. 자신의 진심이 그렇게 통하게 되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이수인이 다른 부대로 옮겨가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사병 하나는 귓속말로 그에게 진실을 밝혔다. "군내 폭력이 모두 사라진 걸로 생각했죠. 밤마다 엄청 맞았어요"라는 말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강경하게 나가면 숨죽이고 있지만 그 본질 자체가 변할 수 없음을 이수인은 군 시절 충분히 체득했다.

▲ JTBC 특별기획 '송곳'
준철을 괴롭히는 새 과장을 때려버린 강민은 즉시 해고됐다. 해고까지 당할 사유는 아니었지만, 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노골적인 행동의 결과는 일동점 지부장인 주 주임의 해고였다. 그를 구원하겠다는 이들에게 극구 반대하는 주 주임의 생각은 간단하고 단순했다. 자신을 구하려는 순간 다른 이들이 사측에 의해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노갈등을 부추기고 노조원과 비노조원 사이를 단절시키는 현장에서 이수인의 고민과 고통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비노조원들도 노동자다. 그들이라고 다를 수는 없다. 노조에 가입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그들을 외면하고 비난하는 순간 그들은 더는 갈 곳이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런 상황은 결국 노조를 고립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노조에 가입하고 노조원으로서 자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권력자들조차 노동자들을 탄압하기에 여념이 없는 현실은 처참하다. 웹툰에서도 마무리하지 못한 <송곳>은 12회 종영된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의 문제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문제이다.

"시민들의 참여야말로 평화롭게 저항하는 노하우다"

93세의 나이로 숨진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는 책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분노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2011년 경향신문은 프랑스 현지에서 그와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인터뷰에서 평화롭게 저항하는 노하우가 바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는 발언은 중요하게 다가온다.

대한민국이 민주화가 된 것은 바로 시민들이 거리에 나오면서부터였다.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민주화를 외치며 대한민국은 독재를 걷어내고 힘겹게 민주사회를 만들었다. 송곳 같은 인간들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그런 송곳 같은 인간들이 곧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마지막 한 회 80분의 이야기만 남겨놓은 <송곳>이 과연 어떤 이야기를 전할지 기대된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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