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_ 지난해 잡코리아가 남녀 직장인들에게 한 해 동안 읽은 책을 조사한 결과, 1인당 평균 9.8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나타났다. 책읽기의 중요성은 늘 강조되지만, 때로는 자신의 퇴근시간조차 가늠할 수 없는 직장인들에게 꾸준한 독서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앞으로 격주 연재될 <고군분투 책일기>는 책을 많이 읽지 못하는 상황을 긍정하면서도 ‘토막 독서’에서 느낀 점을 진솔하게 펼치는, 한 직장인이 즐겁게 써 내려간 평범해서 특별한 서평이다.

친구와 휴대폰으로 채팅을 하고 있었는데 뉴스 앱에서 알람이 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나는 채팅창에 “김영삼 죽었대. 우리 아빠 회사에서 쫓겨나게 한 김영삼 죽었대”라고 적었다.

대학에서 경제학과 수업을 들을 때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라는 말이 연일 뉴스에 나오던 시기였다. 모기가 뭐 어쨌다고. 무심히 지나쳤었다. 경제학 교수님은 그 모기가 어떤 모기인지 설명하시다 “이건 제2의 IMF가 될지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나왔다. 갑작스러운 내 눈물에 나도 놀랐다.

집이 갑자기 어두워진 건 열 살 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손수 만든 쿠키나 빵을 내게 먹이곤 했다. 퇴근한 아빠가 문 여는 소리에 동생과 함께 달려 나가 “다녀오셨어요”라고 힘차게 외치고 품에 안기던 일상이 깨진 건 그 때였다. 아빠의 마지막 출근날 엄마는 주방에 주저앉아 불도 켜지 않고 울었다. 그 날 이후 학교에서 오면 나를 반기던 엄마는 집에 없었다. 어두운 집이었다.

소설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2013, 문학동네)에 등장하는 로자 아줌마는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유태인이다. 그녀는 초인종 소리를 가장 무서워한다. 그 소리를 듣고 나갔다가 독일군에게 잡혀간 기억 때문이다. IMF에 대한 나의 기억과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비교하는 건 물론 가당치 않은 일이지만, IMF라는 말이 ‘딩동’ 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걸 보면 내 인생에 큰 상처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소설 속 아이들은 ’초인종 놀이’로 로자를 놀린다. 그 모습에 나는 죄송하게도 IMF에 대한 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기 앞의 생>은 사랑받고 싶어 몸부림치는 아이 모모와,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는 늙은 창녀 로자의 이야기다. 로자 아줌마는 창녀가 낳은 아이를 맡아 키우며 살아간다. 모모는 로자가 키우는 아이 중 하나, ‘애늙은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소년이다. 아니면 ‘어른아이’ 같은 말. 그리고 생각한다. 늙는다는 건 무엇이지, 어른이 된다는 건 뭐기에 나는 이 아이에게 이런 단어를 붙이는 건가.

어두운 화장실에서 천장을 노려보고 있지 않으면 귀신이 쳐다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변기에서 파란 손과 빨간 손이 올라온다거나. 불 꺼진 화장실에서 습관처럼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이 화장실에 귀신이 있는 것 보다 사람이 있는 게 더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나는 내가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상상하지 않는 것, 아니 상상하지 ‘못하는 것’. 현실의 무서움을 알아채는 것.

또래보다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학교 입학을 거절당한 모모의 친구는 로자 아줌마와 하밀 할아버지다. 소설은 소년의 독백으로 이어진다. 모모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오간다. 천진하게 상상하는 아이였다가도, 곧 처절한 현실에 눈을 부릅뜨는 어른이 된다. 로자 아줌마가 자신을 사랑해서 키워주는 줄 알았던 모모는 매달 자신 앞으로 돈이 부쳐진다는 걸 깨닫고 힘들어한다.

자신이 사랑으로 키워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모모는 아무데나 똥을 싸고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고 부러 들킨다. 뺨을 올려 맞으며 모모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 모모는 “나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무엇인가 하게 한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다치지 않게 하려고 끼익 소리를 내며 급정거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무시당하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140p)” 이라고 말한다. 철없는, 한편으로는 가여운 모모의 꿈은 그래도 로자 아줌마를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늙고 못생기고 더 이상 쓸모없는 창녀들을 위한 포주가 되는 것, 가장 힘센 경찰과 포주가 되어서 로자 아줌마처럼 울고 있는 늙은 창녀가 없도록 하는 것”(149p)이다.

모모가 애늙은이 같은 이유는 어른이 하는 말을 따라하고, 꿈꾸는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창녀촌에서 나고 자라 생의 밑바닥을 일찍 깨우친 모모,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보살피는 소년 모모의 모습은 슬프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내 앞에 놓인 생의 현실 속에서 큰 상처가 생긴다는 것. 그리고 그 상처에 점점 무뎌지는 과정은 아닐까. 모모를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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