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졌어도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늙은 학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파우스트.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했던 파우스트가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는 영혼과 맞바꾸면서까지 누리고자 했던 건 ‘젊음’이었다.

<은교>에서 교과서에 작가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명망 있는 시인 이적요가 부러워했던 단 한 가지가 여고생 은교의 젊음이었듯이, 젊음은 늙은 학자 파우스트에게 있어 되찾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추구할 가치가 있는 최상의 가치였다.

그런데 파우스트가 젊음을 찾자마자 한 일이 무엇인가. 순결한 아가씨 마르그리트를 꾀어 임신시킨다는, 육체의 욕정을 절제하지 못한 나머지 리비도(libido)에 경도된 행동을 보이지 않았던가.

▲ 정신병자 마르그리트와 파우스트 ⓒ세종문화회관
괴테의 원작에서 그레트헨(오페라 속 마르그리트)이 종국에는 신의 구원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그레트헨의 육체는 사형대에서 차디차게 식어가지 않았는가. 비록 그레트헨의 영혼은 구원받았을지언정 육체는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고 인위적으로 목숨을 빼앗긴 비운의 행적이 그레트헨 가운데 배어있는 걸 볼 수 있다.

이러한 거시적인 관점으로 마르그리트를 본다면 그는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서 희생당한 비운의 여인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에게 있어 마르그리트를 사랑한 건 엄연히 죄가 아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임신시킨 것은 리비도에 경도된, 정욕을 절제하지 못한 파우스트의 그릇된 행동이다.

▲ 마르그리트의 고해성사 ⓒ세종문화회관
하나 더, 파우스트라는 남성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생긴 아기를 죽게 만든 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때문이다. 악마를 중성적으로도 바라볼 수 있지만 메피스토펠레스 역시 남성이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 두 남성에 의해 마르그리트가 임신하고, 미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남성 중심의 세계관 가운데서 희생당한 여성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오페라 <파우스트>가 괴테의 원작을 고스란히 답습했다면 마르그리트는 영혼은 구원받을지 몰라도 육체는 사형당해야만 했던, 남성성에 짓눌린 여성성을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출가 존 듀는 이런 원작의 서사를 고스란히 따르지 않았다. 마르그리트는 사형을 당할 타이밍에 구원을 받지만, 반대로 순결한 마르그리트의 육체를 빼앗은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함께 무대가 낙하하면서 지옥으로 떨어진다.

▲ 구원받는 마르그리트와 지옥에 가는 파우스트 ⓒ세종문화회관
남자인 파우스트는 무슨 짓을 해도 마지막에 가서는 구원받지만, 반대로 여성인 마르그리트는 구원을 받는다 해도 이생에서는 목숨을 빼앗긴다는 원작을 인과응보적인 차원에서 유쾌하게 비튼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남성 중심적인 원작의 결말에서 벗어나 주인공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인과응보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오페라를 보며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서울시오페라단의 작품은 재해석이 배제된, 클래식적으로 무대화하는 오페라를 떠올리기 쉬웠다. 하지만 이번 <파우스트>는 서울시오페라단 하면 으레 떠올리던 기존 고정관념을 전복시킨 획기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신선한 재해석이야말로 서울시오페라단에게 있어 필요한 적업이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보다 다양하게 재해석된 오페라들을 선보였으면 하는 바람이 커지게 되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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