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되면 어떤 ‘강박’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을 다루는 방식이 어떤 선을 넘어 버렸다는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이 ‘민중총궐기’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에 비견한 발언을 내놓은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당 대표가 이런 말을 할 때만 해도 차기 대권에 도전하는 정치인 특유의 ‘오버’이겠거니 했으나, 대통령의 입에서 이 논리가 나와 버린 참에는 이게 다 권력의 핵심이 짜놓은 ‘프레임’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거다.

박근혜 대통령은 “IS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라며 집회 참가자들의 ‘복면’을 문제 삼았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비롯해 여당의 주요 정치인들이 언급하고 있는 ‘복면금지법’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소셜미디어 등의 반응은 싸늘하다. “IS 역시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하는 비아냥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 특유의 중언부언 때문에 의미가 희석된 느낌이지만 논리를 정확하게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세계적으로 IS를 비롯한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가 빈번한 상황인데 우리나라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고, 행여나 불법집회로 혼란을 조성한 틈을 타 국내에서 활동하는 테러리스트가 사고라도 치면 안 되지 않느냐, 이런 얘기다. 엉성한 논리지만 하루에 세상사에 10분 이상 관심 가지지 않는 생활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적당한 수준이다.

‘불법집회=테러리스트’라는 등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은 ‘종북’이다. 한국의 특성상 테러에 대한 실질적 공포는 IS가 아니라 북한을 통해 제기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근혜 대통령은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옛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 석방 구호가 나왔다는 것을 문제 삼으며 ‘배후’를 언급했다.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즐겨 다루는 카카오톡 그룹채팅방 등에서 이 논리가 어떤 방식으로 유포될 지는 보지 않아도 잘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언급하는 ‘종북’의 범위에는 옛 통합진보당 주축인사들 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시민사회단체, 진보정당, 제1야당이 포함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언급하면서 우리 사회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으며 불법집회를 통한 정부 무력화 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은 이런 논리적 확장에 좋은 배경으로 작용한다.

박근혜 정부에 있어서 복면금지법이 중요한 이유는 계속해서 반정부(?) 여론이 성장하는 상황을 방치해서는 2008년 촛불집회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스타일(?) 상 문제를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서는 안 되고 공권력을 활용해 여론의 표출을 억눌러야 하는데, 집회 참가자들이 복면을 쓰고 나타나면 수사와 검거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 같으면 시민사회세력이 들고 일어날 일이지만 그저 풀만 죽는다. 그들 스스로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조계사로 피신한 민주노총 위원장의 위상도 과거에 비하자면 더 초라해졌다. 만일 이들이 불법집회의 배후이며 이를 통해 한국사회의 혼란을 야기하고 정부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차라리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별로 남은 힘도 없는 시민사회세력을 이렇게까지 짓누르는 걸 보면 박근혜 정부가 어떤 종류의 강박과 조급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거둘 수 없다.

▲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 강박과 조급증은 ‘총선’이라는 정치일정과 긴밀하게 연결돼있다. 박근혜 정권의 최근 행보를 보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아주 조금의 틈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진다. 대표적으로는 최근의 선거구 획정과 관련한 문제다.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선거구 획정 법정시한을 넘긴 상태에서 논의를 지속하고 있다. 이 논의는 여야가 기존의 입장을 조금씩 수정하고 양보함으로써 거의 타협점에 이르렀었다. 그러나 모처럼 만들어진 합의 분위기를 제1야당이 아닌 여당이 걷어차면서 논의가 장기화되고 있다. 서로 의견이 근접했음에도 여당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청와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들이 대안으로 논의한 것은 정개특위원장을 맡고 있는 새누리당 이병석 의원 안이다. 이 안을 적용할 경우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나란히 의석을 소폭 잃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청와대가 이조차도 인정하지 않아 국회 스스로가 법을 어기는 상황으로 끌려가게 됐다는 얘기다.

친박 일각에서 언급한 개헌론이 신빙성 있게 다뤄진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새누리당 홍문종 의원 등의 개헌 관련 발언이 비중있게 보도되자 친박 중진이라는 서청원 최고위원을 비롯한 인사들이 급히 진화에 나서 개헌론은 수면 아래로 다시 잠복한 상태다. 그러나 이미 여의도 주변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퇴임 이후 TK를 중심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권력 핵심부의 작업이 시작됐다는 풍문이 정설처럼 돌고 있다. 자타칭 ‘진실한 사람들’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국회로 진입시키는 것은 이를 위한 필수 작업이다.

그렇더라도 내년 총선에서 개헌선에 가까운 의석수를 얻기 위해 박근혜 정권이 무리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분히 ‘소설’의 영역일 것이다. 하지만 개헌을 위해서든 진실한 사람들을 위해서든 청와대가 총선에서 최대의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건 사실일 수밖에 없다. 꼭 개헌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박근혜 정권 입장에서는 내년 총선을 ‘좋은 분위기’ 속에서 치러내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절박한 이유란 집권 3년차를 지나고 있음에도 박근혜 정부가 뚜렷한 성과를 못 내고 있다는 데서 온다. 1년차에는 좀 좌충우돌 하더라도 2, 3년차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을 대통령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2년차를 세월호 참사와 청와대 문건유출 사고로 그야말로 ‘날려버렸다’. 임기 반환점마저 돌지 않은 시점에 이미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기까지 했다. 4년차부터는 권력이 무슨 마음을 먹든 권력누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3년차에 뭐라도 방향을 명확히 해놔야 그나마 임기 내에 어떤 성과라도 남길 수 있다는 얘기다.

박근혜 정권이 단기간 내에 4대개혁부터 국정교과서까지 한꺼번에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지고 있는 건 결국 이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부를 향한 칼날을 아무리 예리하게 벼려도 내부에서 무너지면 소용이 없다. ‘배신의 정치’를 언급하며 유승민이라는 분란의 싹을 잘라버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기 대권주자를 통제하지 못해 여당 장악에 실패하면 답이 없다는 건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가 잘 안다. 이명박 정권 시절에 본인이 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정권이 이렇게 나오면 자연스럽게 시선은 야당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아직까지 야권은 총선을 대비한 선도적 의제나 이와 관련한 대응 일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힘이 센 정부 여당이 훨씬 절박해보이고 힘이 약한 야당들은 하나같이 한가해 보인다. 어떤 인사는 아예 이미 총선은 물 건너 갔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새누리당이 오버하거나 박근혜 대통령이 이상한 말을 하면 분명 지지율은 움직인다. 올라가거나 내려간다. 그러나 제1야당에 대한 지지율이나 주요 대권주자의 지지율은 분석 불가능이다. 여론조사기관이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 결과를 발표하긴 하지만, 사실은 왜 올라갔는지 왜 떨어졌는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게 합리적이다. 자기비하를 하자는 게 아니라 이제는 절박해질 때가 됐다는 것이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을 테러리스트 취급하는데 가만히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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