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홍보수석이 KBS 최고의결기구이자 KBS 사장 후보 최종 1인을 추천할 수 있는 KBS이사회의 ‘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5배수로 추려진 후보자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며 ‘KBS 사장으로 내려가는 것을 검토해 달라’고 했다. 사장 공모 전부터 청와대 홍보수석과 KBS 이사장은 자주 연락해, 새 출범하는 이사회를 어떻게 구성할지도 논의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당시 보도 및 인사 개입 사실이 드러나 길환영 사장이 해임됐을 때, 여당 추천 이사들의 표가 분산돼 ‘뜻밖의 인물’이 사장이 된 ‘사건’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여당 추천 이사들을 뽑을 때 각서 수준의 다짐까지 받아냈다.

2009년 11월, 2012년 12월, 지난해 7월 KBS 사장 공모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다가, 이번에 지원했을 때에는 1차 투표에서 5표를 얻어 고대영 후보와 함께 ‘다득표자’로 이름을 올린 강동순 전 KBS 감사가 밝힌 내용이다. 강동순 전 감사의 말을 뒷받침하듯 KBS이사회는 사장 면접에서 마치 합심한 듯이 한 사람에게 표를 몰아줬고, 덕분에 고대영 후보는 일사천리로 최후의 1인이 됐다. (▷ 관련기사 : 강동순 “고대영 KBS 사장 선임, 김성우-김인규 작품”)

청와대와 KBS의 끈끈한 관계는 이미 1년 전, KBS 보도책임자였던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입을 통해 ‘증언된’ 바 있다. 정확한 시점과 구체적 지시 내용, 풍부한 사례 등이 언급된 데다, 대정부 질의에서 ‘KBS에 해경 비판 리포트는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는지 묻자 정홍원 총리가 시인한 점 등을 두루 고려했을 때 사실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KBS기자협회 역시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말을 사실로 판단했다. 사장 임명제청권이 있는 KBS이사회도, 최종 임명한 청와대도 길환영 사장을 지켜주지 않았고, 결국 그는 해임됐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권오훈, 이하 새 노조) 노보를 통해 드러난 강동순 전 감사의 폭로는, 3년 간 KBS를 책임지는 사장을 정하는 과정에서 청와대가 얼마나 노골적으로 관여했는지를 보여주는 ‘폭탄급 발언’이었다. ‘KBS와 청와대의 지나치게 가까운 사이’ 때문에 홍역을 치른 지 불과 1년 6개월 여 만에 또 다시 유사한 폭로가 나온 것이다. 더구나 김성우 홍보수석, 이인호 이사장, 조우석 이사, 김인규 전 KBS 사장 등 수많은 인사들의 실명이 거론됐고, 사장 공모 전후 벌어진 이들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와대 개입설’은 고대영 후보가 KBS 사장으로 안착하는 데 어떤 위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하나의 해프닝으로만 처리됐다. 방송법 개정으로 올해 처음 치렀던 KBS 사장 후보 인사청문회에서 구색 맞추기 정도의 질의응답을 했던 국회와, 의혹의 중심에 서 있고도 ‘뭉개기’에 앞장 선 KBS이사회의 공조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청와대 개입설’ 폭로, 적극적으로 뭉갠 KBS이사회

언론현업·시민단체에서 공영방송 KBS 사장으로 적합한 인물을 뽑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막아 보자는 수준까지 내려간 ‘사장 공모’에서, 마지막 걸림돌로 희망을 가졌던 것이 국회 인사청문회였다. 그러나 증인·참고인 한 명 불러내지 못한 청문회는 흐지부지됐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곧 사장이 될 고대영 후보를 감싸기 급급했으며, KBS 사장 청문보다 내년 총선이 급했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 역시 폐부를 찌르기는커녕 헛발질만 했기 때문이다. (▷ 관련기사 : 고대영 KBS 인사청문회는 왜 ‘무기력’하게 끝났나)

▲ 24일 오전 10시 취임식을 갖는 고대영 KBS 사장 후보 (사진=KBS)

이사장과 이사들의 이름이 실명 혹은 익명으로 거론돼 강동순 폭로의 중심에 있었던 KBS이사회 역시 거센 의혹 해명 요구를 적극적으로 ‘무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해 나갔다. 강동순 폭로 이후 미디어오늘 보도(▷링크)를 통해 손병두 박정희기념재단 이사장과 이인호 이사장이 KBS 사장 공모를 할 때 ‘입 맞추기’를 했다는 새로운 정황이 포착돼, 의혹은 커져갔지만 KBS이사회는 꼿꼿했다.

청와대 김성우 홍보수석과 수차례 통화를 해 ‘큰 그림’을 그린 것으로 지목되는 이인호 이사장은 모든 문제제기를 부정했다. 고대영 후보 선임에 대해 이인호 이사장의 이름이 많이 나온다는 지적에 그는 “그냥 그건 무시하라”며, ‘청와대 개입설’에 대해 “떨어진 사람(강동순)이 보복성으로 이것저것 떠드는 걸 뭐라고 하겠나”라고 반문했다. 미디어오늘 기사에 대해서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병두 이사장과 이인호 이사장의 대화를) 우연히 듣는다는 것도 우스운 소리다. 상대하지 않겠다”고 일축했다.

야당이사 4인은 ‘청와대 개입설’은 KBS이사회의 정치적 독립성을 위배하고 중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문제이니만큼 지난 18일 이사회에서 정식 안건으로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여당이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여야 7:4 구조 속에서 언제나 우위를 차지하는 여당이사들은 안건 상정 여부마저 표결하자고 주장했고, 결국 제대로 된 논의도 되지 못한 채 안건은 부결됐다.

강동순 전 감사의 폭로 내용이 허위라면, 있지도 않은 KBS이사회와 청와대의 ‘특수관계’를 만들어 허위 사실을 유포한 강동순 전 감사를 고발하자는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야당이사들은 법적 조치가 어려우면, 의혹을 깨끗이 해소할 수 있도록 KBS이사회 명의로 ‘공식입장’이라도 내자고 말했으나 모두 거부됐다.

“이사회 회의는 공개해야 한다”를 원칙으로 하는 방송법 개정 취지를 무시한 채, 여당이사들 주도로 이사회를 비공개로 한 덕에 직접 취재를 해야 했지만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인호 이사장, 조우석 이사 등 실명으로 언급된 이사들에게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닿지 않았다. 여당이사들은 ‘묵묵부답’이라는 전략을 통해 역대급 폭로를 해프닝으로 축소하는 데 성공했다.

야당이사들의 ‘무기력’도 한 몫 했다. 야당이사들은 매번 합리적 의심을 할 만한 중요한 문제를 ‘이사회 회의’라는 공개적 논의의 장으로 끌어오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막 나가는 여당이사들에게 제동을 걸지도 못했고, 판도를 뒤집을 만한 ‘강수’를 두지도 못했다.

야당이사들이 억울해 할 만한 ‘여야 7:4 구조’는 변치 않는 상수다. KBS 내부 구성원들과 언론시민사회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은 데다, 청와대 입김이 들어갔다는 구체적 폭로가 나온 인물이 KBS 사장으로 오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더 분명하고 강했다면 이렇게 맥없이 여당이사들의 ‘뭉개기’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건 상정이 부결되고 나서 야당이사들이 한 것이라곤 “이후 KBS 독립성 훼손에 관하여 쏟아지는 모든 비판에 대한 책임은 다수 이사들이 져야 할 것”이라는 성명 한 장뿐이었다.

그 사이, 인사청문회도 수월하게 넘겼고 KBS이사회 여당이사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보호를 받으며 추가 문제제기까지 사실상 ‘원천 차단’한 고대영 후보는 내일이면 KBS 사장이 된다. 고대영 후보 취임식은 24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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