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권리 가운데 몇몇은, 불과 100여년 남짓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권리는커녕 금기시되던 어두운 역사가 있었다. 흑인 참정권과 여성 참정권, 혹은 어린이를 노동에서 배제하는 인권 사상은 지금이야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되지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만 해도 당연한 권리 향유는커녕 이를 주장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지 않았던가.
<도리화가>의 ‘조선 최초의 여류 소리꾼’이라는 타이틀도 알고 보면 여자=판소리라는 공식을 불허하던 금기의 역사에 도전장을 낸 결과로 얻어진 타이틀이다. 여자가 고대 그리스에서 열리던 올림픽을 관람할 수 없었고, 만일 몰래 관람하다 적발되면 처형을 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조선시대 역시 여자가 판소리를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여성 판소리를 불허하던 금기의 시대였다.
배수지가 연기하는 진채선은 여성이 판소리를 금하던 시대 속에서 금기를 넘어서는 꿈을 꾼다. 여성이라는 성적 차별을 딛고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그 유명한 넘버 ‘이룰 수 없는 꿈’ 마냥 판소리를 할 수 있다는 꿈을 가슴에 품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가기에, 진채선의 이룰 수 없어 보이는 꿈은 진채선의 ‘자아 성취기’이면서 동시에 여성이 판소리를 할 수 없다는 금기에 정면으로 맞선 ‘투쟁의 서사’로도 읽힐 수 있다.
영화를 진채선의 자아 성취기로 본다면, 영화의 전반부와 중반부는 진채선이 판소리를 할 수 있는 ‘테크닉’을 익히는 도제의 과정에 집중한다. 소리꾼이 되기 위해 폭포수를 건너편에 두고 발성하는 장면이나, 배에 밧줄을 묶고 발성하는 장면은 제자가 대가의 테크닉을 전수받는 도제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소리꾼이 되려면 다양한 내적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고 영화는 속삭인다. 판소리는 소리만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판소리 속 인물에 감정이입할 수 있을 때에야 청중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데, 이는 다양한 체험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판소리에서 다양한 감정의 체득이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언급한다.
하지만 진채선이 진정한 소리꾼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인 체험이 다양하지 않다는 점부터 영화는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었다. 진채선이 진정한 여류소리꾼이 되기 위한 ‘득음’에 도달하기 위해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체득하고 깨닫는 과정을 영화는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귀착하는 단순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소리꾼이라는 실화의 정체성을 영화는 사랑 지상주의에 천착하는 환원주의의 오류를 저지르고 만다. 소리꾼이라는 진채선의 정체성이 사랑 지상주의 앞에서 함몰 혹은 침몰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까 싶을 정도로 영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소리꾼 이야기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후반부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소리꾼 배수지는 있었지만 조선 최초의 여류 소리꾼이라는 정체성이 무색해진 영화가 <도리화가>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