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동안 우리를 아프게 한 두 개의 뉴스가 있다. 첫 번째는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전망과 분석, 해설을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더 말을 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다시 돌아올 어떤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1999년 미국에서 일어난 컬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담론이다. 당시 미국의 언론은 고교생들이 게임과 과격한 메탈음악, 이를테면 ‘마릴린 맨슨’에 빠져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묘사했다. 2003년 개봉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컬럼바인>은 이런 분석의 비겁함을 따져 물은 다큐멘터리의 명작이다. 특정한 문화적 코드가 아니라 총기소유를 합법화 하고 있는 미국의 특이한 문화적 제도적 배경이 이 참사를 불러온 핵심이라는 게 이 작품의 주제의식이다.

이 사건을 다룬 것으로 유명한 또 하나의 작품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이다. <볼링 포 컬럼바인>이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논리적으로 추적하는데 방점을 두고 있다면 <엘리펀트>는 사건의 과정을 단지 관조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헐리우드에 익숙한 가벼운 사람의 시선으로 보기에 이 영화는 약간 ‘어렵다’. 그러나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이 벌어진 것이 누구의 책임인지, 어떤 잘못에 의한 것인지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지만 정작 사건을 일으킨 주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엘리펀트>가 추구하는 것은 그런 세태에 대한 소박한 반항으로 보인다.

파리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IS에 대한 군사작전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그것은 정당한가 부당한가, 같은 잘못을 어떻게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중동의 질서를 누가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유럽의 난민 정책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 유럽 내 극우세력의 준동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등등의 수많은 쟁점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러한 쟁점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도 이 사건을 일으킨 주체들에 대한 관조적 접근을 시도해보는 게 필요할 수 있다.

▲ 16일 오전 서울 서대문 주한 프랑스대사관 앞에 촛불을 밝혀 프랑스 파리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명분이 사라진 시대다. 명분이 아니라 ‘대의’라고 불러도 좋겠다. 자본주의적 질서에 의해 정초된 세상만사에 대한 소비자적 태도와 이것이 조장하는 열등감, 다시 이로 인해 촉발된 정치적 냉소주의의 세계에서 우리의 대의는 체제적 파탄이라는 현실로 드러난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는 대의가 없는 세상에서 대의를 찾아 방황한다.

예를 들면, 북한이 DMZ에서 ‘지뢰 도발’을 일으켰을 때, 우리의 젊은이들이 군복을 다시 꺼내 국가에 대한 충성을 결의한 것은 대의를 향한 움직임이었다. 일각에서는 국가주의에 물든 젊은이의 정신을 우려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앞서 보아야 하는 것은 젊은이들 사이에 무언가의 대의,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공공선’에 자신의 운명을 바쳐야 한다는 충동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예비군 열풍’은 그 충동에 우리 사회가 고작 체제 수호를 위한 국가주의로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드러낸다.

지금은 생사가 불분명한 ‘김군’처럼 전 세계에서 모여들고 있는 ‘이슬람 전사’들도 어떤 측면에선 마찬가지의 충동에 휩싸이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여성들, 외국인 노동자들, 오염된 종교적 신념들 때문에 잘못되었으므로 그것을 바로잡는 운동에 자신을 바쳐야 하겠다는 그런 충동들 말이다. IS에 합류하면 한 명 이상의 부인을 가질 수 있다거나 평생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식의 허황된 선전의 영향력은 덤이다.

결국 북한의 도발에 군복으로 맞서겠다는 사람들이나, 어떤 이유로든 IS에 합류하겠다는 사람들이나, 유럽에서 준동하는 극우주의에 몸을 내맡기는 사람들이나 어떤 ‘대의’에 목숨을 걸기로 다짐한다는 점에서, 또 그런 충동에 적극적으로 몸을 내맡긴다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들이 목숨을 걸기로 한 그 ‘대의’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처지에 해를 끼치는, 굳이 표현하자면 ‘가짜 대의’에 가까운 것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진짜 대의’라는 게 실종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은 주말을 장식한 두 번째 뉴스와 관련한 사실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방송뉴스는 주말에 있었던 ‘민중총궐기’라는 이름의 집회를 ‘폭력시위’라는 틀을 통해서만 보도하고 있다. 시위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경찰이 과잉진압을 해 폭력의 양상을 확대시켰다고 반론하고 있다. 이건 아주 익숙한 광경이다. 매년 벌어지는 거의 모든 종류의 대형집회에서 이런 논쟁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제기되고 있다.

주목해봐야 할 것은 폭력의 원인을 제공한 주체가 경찰이냐 시위대냐의 논쟁에서 약간 비껴서있는 어떤 불평들이다. 이런 불평들은 집회의 전술과 관련한 부분에서 제기되고 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사실상 아무것도 한 게 없지 않느냐’, ‘자꾸 청와대로 가자고 하는데, 거기 가서 뭘 하자는 거냐’,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이런 집회가 지겹다’는 등의 푸념이 나오는 것이다.

▲ 14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 인근에서 민주노총 등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개최한 정부 규탄 '민중총궐기 투쟁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행진하던 중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실 이런 푸념조차도 이제는 일상이다. 여기에 대해 새롭고 다양한 집회 전술을 개발하겠다고 대답하는 건 ‘오답’이다. 어떤 집단적 불평은 대개 그 이면에 그 불평들의 표면적 논리와는 별개의 어떤 대중적 무의식을 포괄하고 있기 마련이다. 이들의 이런 불평은 결국 이 집회를 왜 했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으로 귀결된다. 분명히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고, 이 분노를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공적 차원으로 풀고 싶어 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운동세력은 집회를 조직할 수밖에 없는데, 정작 모아놓고 보니 어떤 대의에 호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지 오래인 것이다. 실제 청와대로 진격(?)하지 못하더라도, 집회가 별다른 프로그램 없이 다소 혼란스럽게 진행되더라도, 분노한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 확인이 돼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허무함만 남기고 만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결론은 이것이 정치적 담론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정치에는 오로지 누구를 단죄하기 위한 과장된 수사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을 제대로 읽고 그들의 분노와 공적 충동을 공동의 선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담론이 필요하다. 우리는 거짓된 대의에 맞서 ‘진짜 대의’를 세우는 일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그런 대의 없이도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충분히 공적 역할을 자임하며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물론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언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양자의 문제는 따로 떼서 생각할 수도 없다. 지금 우리는 과연 제대로 잘하고 있는가? 도저히 거둘 수 없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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