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이 또 통했다. “세 번째 시리즈가 성공하는 경우는 잘 없어서 이번 시리즈는 폭망(폭삭 망한다는 의미)할 것 같다”는 신원호 PD의 예언은 빗나갔다. 6일 오후 7시 50분 방송된 tvN <응답하라 1988> 1회 ‘손에 손잡고’는 6.7%, 이튿날 방송된 2화 ‘당신이 나에 대해 착각하는 한 가지’는 7.4%의 평균 시청률(닐슨코리아/유료플랫폼 가구/전국 기준)을 기록했다. 케이블·위성·IPTV 통합 동시간대 1위를 기록한 것은 물론, 전작 <응답하라 1994> 첫 방송 시청률 2.6%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신원호 PD는 앞서 <응답하라 1988> 기자간담회에서 ‘오글거리지 않는 가족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연스러운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가족 이야기를 원했기에 ‘센 임팩트’도 없고 그래서 ‘심심한 느낌’도 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다시 ‘응답앓이’에 빠졌다.

훈훈했던 1988년의 골목, 그 시절 추억을 소환하다

▲ 6일 첫 방송된 tvN <응답하라 1988>

‘응답’ 시리즈는 ‘그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만들어 내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응답하라 1988>은 여러 장면과 소품을 활용해 지난날의 추억을 부지런히 꺼냈다. 우선, 당시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각각 왕조현, 소피 마르소와 톰 크루즈, 리처드 기억에 열광했고 <영웅본색>과 성룡 시리즈 등 홍콩영화 신드롬이 불었다는 문화적 상황은 주인공 성덕선의 입을 통해 소개됐다.

버터케이크로 생일파티를 하는 장면, 비싼 아이스크림의 대명사였던 월드콘 가격을 보고 놀라는 장면, 갓 지은 밥이 식을 세라 이불 밑에 넣어두는 장면, 이제는 사라진 교련복을 입고 있는 장면, 연탄가스가 샌 날 동치미 국물을 마시며 정신을 차리는 장면, 집 앞 평상에서 다 같이 멸치를 다듬고 같은 날 ‘뽀글이 파마’를 하는 장면 등은 마치 1980년대 후반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 가족처럼 지냈던 골목 이웃들의 끈끈한 관계도 <응답하라 1988>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 중 하나였다. 88올림픽 피켓걸이 된 덕선(혜리)의 모습을 보기 위해 동네 친구들 가족까지 TV 앞에 모이고 비디오테이프 녹화를 대신해 주는 장면, 바둑 기사 택(박보검)이 바둑대회에서 우승하자 모두 모여 축하파티를 해 주는 장면, 반찬을 얻어오면서 다른 먹을거리를 공유해 어느새 식탁이 풍성해지는 장면 등 지금은 보기 어려운 장면들이 지속적으로 노출되며 ‘향수’를 자극했다.

전작보다 더 풍성해진 캐릭터, 예상 못한 ‘깜짝 출연’까지

어느 하나 평범하지 않은 흥미로운 캐릭터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맏딸과 막내아들 사이에 낀 탓에 설움을 당하면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는 여주인공 성덕선(혜리), 무뚝뚝한 것으로는 당할 자가 없지만 의외로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김정환(류준열), 동네 어른들에게도 막둥이 동생에게도 잘 하는 반듯한 모범생 선우(고경표), 쌍문동 박남정으로 불리는 재간둥이이자 소식통인 류동룡(이동휘), 말수가 적고 차분한 천재 바둑기사 택(박보검) 등 쌍문동 골목친구 5인방은 각기 다른 개성을 자랑한다.

▲ <응답하라 1988> 출연진들

전작 두 편이 주인공과 주인공 친구들에게만 초점을 맞췄다면, ‘2015년판 한지붕 세가족’을 지향하는 <응답하라 1988>에선 쌍문동 5인방 가족들의 비중이 작지 않다. 서울대 운동권 학생으로 덕선과 쉴 새 없이 싸우는 큰딸 보라(류혜영), 무서운 누나들 앞에 기를 못 펴는 남동생 노을(최성원), 전화번호부 정독을 취미로 삼는 독특한 ‘덕후’이자 대입 6수생인 정봉(안재홍), 선우 막둥이 동생으로 온 동네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진주(김설)이 대표적이다.

응답 시리즈 전편에 출연해 이제 하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성동일-이일화 부부에게 전작과 같은 점, 다른 점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일화는 동네 이웃들과 수다 떨기를 좋아하고 빚보증을 잘못 선 은행원 남편을 구박한다는 설정이 추가되었지만 음식을 한 번 하면 상다리가 무너질 정도로 차리는 ‘큰손’이라는 특징은 유지됐다. 성동일에게선 빚보증 때문에 기죽어 있는 설정과 집 밖 마루에서 못 하는 얘기가 없는 아줌마 3인방(덕선네-정환네-선우네)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새로 발견할 수 있다. 웃음과 감동이 요구되는 씬 모두에서 발군의 연기를 선보이는 것은 여전하다.

<응답하라 1994>에서 노안이지만 가장 나이가 어리고 다소 엉뚱한 면이 있었던 삼천포로 분했던 김성균은 성대모사와 개그를 좋아하지만 늘 연상의 아내 라미란에게 무시당하는 남편으로 돌아왔다. 여기에 현재 45세가 된 성덕선과 그의 남편 역으로 출연한 이미연-김주혁의 깜짝 출연도 화제를 모았다.

초미의 관심사 된 ‘덕선이 남편 찾기’

신원호 PD는 <응답하라 1988>에서도 남편 찾기는 등장한다고 밝혔다. ‘지나간 시절’과 ‘첫사랑 코드’는 뗄 수 없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또 남편 찾기냐’라며 식상하다는 우려가 존재했으나, 시청자들은 이번에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벌써부터 수십 종류의 커플을 바탕으로 한 추측과 분석이 각종 드라마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 덕선(혜리)의 남편 후보 1순위로 급부상한 정환(류준일). 우간다 피켓걸로 나오는 덕선을 보고 미소 짓는 모습

가장 유력한 남편 후보로 떠오르는 인물은 정환이다. <응답하라 1997>의 윤윤제(서인국)와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정우)는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만능 캐릭터로 선망의 대상이었고,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인 여주인공과 가장 많이 투닥거리며, 약간은 무뚝뚝하고 속 깊은 캐릭터라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이 공식에 정환이 가장 부합한다는 이유다. 벌써부터 배우의 이름을 딴 유행어(어남류 : 어차피 남편은 류준열)까지 나왔다.

하지만 아직 극 초반부여서 다른 캐릭터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지 않아 선우, 택 등도 남편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덕선의 언니인 보라의 남편이 누구일지에 대해서도 일찌감치 여러 가지 후보군이 나와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땐 참 좋았지 정서 일깨우는 ‘판타지’

<응답하라 1988>은 1988년에 볼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노출하면서 그 시절의 리얼리티를 최대한 살리고 있지만, 동시에 그 시절 중 가장 좋았던 부분을 선택적으로 차용하기 때문에 하나의 ‘판타지’를 보여준다는 한계를 지닌다.

특정 연도를 제목에 언급할 만큼 시대적 배경을 강조하지만, 그 시절의 어두운 모습은 얼핏 스쳐지나갈 뿐이다. <응답하라 1988>은 당시 가장 큰 이벤트였던 88 올림픽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여주인공의 주요 에피소드로 썼다. 덕선은 고등학생으로서는 3명밖에 뽑히지 않은 피켓걸을 맡아 고된 연습을 했으나, 남북 공동 주최 올림픽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다가스카르가 출전을 거부해 그동안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이 에피소드는 처음에 둘째딸로 계속 치여만 살아온 덕선의 안타까운 처지를 부각하는 결정타로 쓰였다가, 나중에 우간다 피켓걸이 되어 결국 전 세계에 얼굴을 비추는 데 성공하는 ‘반전’ 장치로도 활용된다.

주말도 없이 땡볕에서 훈련을 하는 덕선의 모습 등으로 정치적 목적이 들어가 있는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에 많은 시민들이 동원됐다는 점을 유추할 수는 있지만 결코 선명하게 드러나진 않는다. 서울대 운동권 학생인 보라가 피켓걸 연습에 한창인 덕선과 다툴 때 “정부의 우민화 정책(Sports, Sex, Screen 앞글자를 따 3S 정책이라고 불렸음)에 놀아나고 있다”며 “올림픽 때문에 얼마나 많은 철거민이 생겨났는지 알아?”라고 일갈한 것이 그나마 유일한 ‘비판적 접근’이었다.

▲ 서울대 운동권 학생인 보라(류혜영)는 마다가스카르 피켓걸로 뽑혀 연습하고 있는 동생 덕선에게 "정부의 우민화 정책에 놀아나는 것"이며, "올림픽 때문에 얼마나 많은 철거민들이 생겨났는지 알아?"라고 묻는다.

<응답하라 1988>은 굳이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87년 민주화 항쟁 직후였던 1988년의 ‘혼란’이나 ‘시대의 비극’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실상 군부에서 다른 군부로 이양된 정권의 이야기도, 노동자와 철거민의 눈물도, 사회 곳곳에서 움텄던 민주화 운동의 흔적도 소거됐다. 그 빈곳을 “아, 저 때는 저렇게 반찬도 나눠먹고 참 이웃끼리 사이가 좋았지”, “골목 친구들과 금세 단짝처럼 지냈지” 하는 류의 ‘추억 더듬기’가 채웠다.

이 같은 전개는 “사회적 사건이 중심에 있게 되면 리얼리티가 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신원호 PD의 말로 이미 예상 가능한 부분이었다. 다만 아직 2회밖에 방송되지 않았고, 서울대 운동권 학생이라는 포지션을 맡고 있는 보라의 비중이 작지 않은 만큼 앞으로 각종 사건사고들을 어떻게 녹여낼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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