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건 무덤에 가서 실컷 자면 된다”고 말하는 예술감독이자 현역 발레리나가 있다. 그의 이름은 강수진. 기자간담회에서, 어제 연습보다 오늘 연습할 때 보다 나은 기량이 나왔을 때 기쁘다는 강수진의 답변은 그가 발레를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달려왔는가를 짐작하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에게 붙여진 ‘강철나비’란 별명은 괜히 붙여진 별명이 아니다.
국립발레단 단원의 기량은 강수진 예술감독이 부임하기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강수진 예술감독이 부임하기 전에는 국립발레단 공연에서 여러 명이 아라베스크를 할 때 정렬된 느낌을 갖고 관람하기 어려웠다. 단원 중 누군가의 다리는 파르르 떨리거나 일직선으로 아라베스크가 맞춰지지 못한 상태에서 무대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수진 예술감독이 부임한 다음부터는 국립발레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무대에서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술감독이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현역 무용수이자 종신단원이다 보니, 국립발레단 단원들도 이에 자극받아 열심히 하는 게 무대에서의 일사불란함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오네긴>은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표현이 적합한 공연이다. <오네긴>의 주인공인 오네긴은 ‘정말 나쁜 남자’다. 오네긴에게 사랑을 고백한 수줍은 아가씨 타티아나의 러브레터를 찢어버릴 때는 언제고, 반대로 타티아나가 유부녀가 되어서야 사랑을 고백하다가 거절당하는 ‘정말 나쁜 남자’말이다.
1막에서 타티아나가 오네긴을 얼마나 사모했나 하는 심정은 두 장면에서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하나는 막이 내려진 후 강수진이 오네긴이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뻗치면서도 몸은 손과는 정반대로 ‘파 드 부레’로 뒷걸음질 치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오네긴과 ‘그랑 파 드 되’를 아름다운 몸짓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이었다. 발레리노와 발레리나의 찰나의 아름다움이 표정 연기와 일치하는 가운데 숨을 멎게 할 정도의 완벽함이 있었다.
이제는 독일에서 열릴 내년 7월 발레 티켓을 구매하지 않는 한 강수진의 멋들어진 발레를 보는 건 영영 불가능해졌다. 강수진이라는 거장의 공연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크지만, 발레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모든 걸 바쳐온 강수진의 외길 인생에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공연이 강수진 &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오네긴>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