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아니었다면 <내부자들>은 보는 이의 상상에 결말을 맡기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 될 뻔한 작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부자들>은 완성된 웹툰이 아니라 미완성된 작품이었기에 웹툰이 만일 영화라는 ‘원 소스 멀티 유즈’로 환생되지 않았다면, 읽는 이의 취향과 상상력에 결말이 얼마든지 갈릴 수 있는 ‘열린 결말의 작품’으로 영영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영화의 트렌드 가운데 하나는 경제적인 계급 사이에서 일어나는 갑과 을의 관계에 천착한다는 점이다. 영화 <베테랑>의 천만 관객을 넘는 성과는 경제적인 갑의 횡포를 응징하는 사회적 정의에 대한 대중의 갈망을 영화로 풀었기에 가능했다.

▲ 영화 <내부자들> 스틸 이미지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오피스>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회사 정직원이 회사의 부속품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비정규직에게 ‘갑’ 행세를 하다가 한순간에 골로 가는, 고아성의 ‘을의 반란’을 스크린으로 묘사하지 않았던가. <내부자들> 역시 대기업 회장과 대권 후보, 언론사의 논설주간 위원이라는 삼각 편대가 펼치는 ‘그들만의 리그’를 정조준하는, 경제적인 계급에 있어서의 갑의 세계를 ‘을’인 이병헌과 조승우가 파헤친다는 줄거리를 갖는 영화다.

조승우가 연기하는 우장훈 검사는 조직에서 열심히 일하기는 해도 두드러지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건 우장훈이 학연이나 지연 같은 인맥이 하나도 없는 ‘흙수저’ 출신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개천에서 검사라는 ‘용(龍)’이 난다 해도 학연이나 지연과 같은 커넥션이 없으면 자력으로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는 걸 우장훈의 사례를 들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영화가 비약적으로 표현한 게 아니라 실제 한국 사회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려면 인맥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 깡패 안상구(이병헌 분)가 복수를 위해 대기업 회장과 대선 후보, 언론사 논설주간을 타깃으로 삼는다고 치자. 그렇다면 우장훈은 무엇 때문에 이들 삼인방에게 칼날을 정조준해야 할까. 한국 사회의 정의 구현? 만일 우장훈이 금수저나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성골 혹은 진골 출신 검사였다면, 아마도 그는 이들 권력 삼인방에게 칼날을 겨누지는 않았을 것이다.

▲ 영화 <내부자들> 스틸 이미지
되레 이들 삼인방의 측근이 되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창 나는 용의 등에 올라타 한 자리를 얻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우장훈이 이들 삼인방에게 ‘딸랑’거리고 아부하기는커녕 이들을 정조준한다는 건 우장훈 자신이 흙수저 출신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조직에서 극복하기 위해서다.

조직에서 아무리 애를 써보았자 단물만 쏙 빼 먹힐 게 분명하니 삼인방을 공공의 적으로 상정하고 이들의 비리를 파헤쳐서 이름을 날려 보겠다는 입신양명의 동기에서 우장훈은 이들 삼인방을 파헤치려 드는 것이다. 우장훈이 대기업 회장과 대권 후보, 언론사의 논설주간 위원이라는 삼인방을 정조준하는 이유는 정치 깡패 안상구와는 달리 그가 흙수저 출신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내부자들>은 우장훈과 안상구가 손을 잡기까지 그리고 권력의 삼인방의 커넥션을 파헤치는 과정을 치밀하고 몰입도 있게 그린, 원작 웹툰이 묘사하지 못한 결말을 통쾌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장훈이 타깃으로 삼은 권력의 삼인방이 왜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 부여에 있어서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이 약점으로 남는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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