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다 흐르다 만났으니 그냥 흘러가자”

몇 해 전 SBS 배성재 아나운서가 열애설에 대해서 “나라가 이 꼴인데 연애는 무슨”이라는 말을 남긴 바 있었다. 그때 많은 누리꾼들이 연애와 나라꼴이 무슨 상관이냐는 의문을 표했었다. 그러나 나라꼴이 엉망이라 연애 못 하겠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나라꼴이 정 엉망이면 연애도, 인생도 모두 망가지는 법이다.

바로 ‘육룡의 나르샤’ 땅새와 연희의 사랑이 그렇다. 땅새의 연인 연희는 홍인방(전노민)의 가노들에게 하필이면 칠석날 변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태어난 고향을 등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고려가 그렇게까지 엉망진창이 아니었다면 땅새와 연희는 고향에서 어렵지만 오순도순 살아갈 평범한 소년과 소녀였다.

▲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그런 그들이 세월이 흘러 서로 알아도 아는 체를 할 수 없는 존재들로 다시 만났다. 하나는 가마 안에서 비밀스런 일을 지시하는 입장으로, 다른 하나는 가마 밖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지시를 받는 처지로 말이다. 결국 둘이 하는 일의 목적이 같지만 고려의 땅에서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땅새는 가마 밖에서 아주 오랫동안 부르고 싶었던 그 사람의 이름을 누가 들을까 저어하며 그러나 간절하게 불러보지만 가마 안의 연희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는 투로 사무적인 내용을 겨우 전달할 뿐이었다. 비극이다. 헤어지게 된 사연부터 비극이지만 하늘이 준 인연으로 다시 만나서도 가슴의 쌓인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서로 아는 척 하지 말자는 말을 주고받을 뿐인 이 상황은 비극이다.

▲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여자는 좀 더 독해 보였다. 연희는 땅새에게 “흐르다 흐르다 만났으니 그냥 흘러가자”고 말한다. 참 덤덤하게 말하고 들었지만 그들 가슴 속에 흐르는 것은 통곡의 강이다. 세상 아무도 듣지 못하지만 그들 서로에게만 들리는 통곡이다. 그렇게 마음과 다른 말로 짧은 만남을 마무리하고 돌아서는 연희의 등을 땅새는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아픈 사내의 표정을 보는데, 그래서 참 안쓰럽기만 한데 그런 땅새의 모습이 아찔하게 아름답다. 사실 땅새 역의 변요한은 소위 말하는 꽃미남과는 아니다. 특히나 미생의 한석율의 가볍고 수다스러운 인상이 아직 남아 있어서 이처럼 애절한 장면과 잘 어울릴 거라 짐작도 하지 못했다.

▲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이미 몇 번의 무술장면을 통해서 변요한은 오래 굶주린 늑대 같은 모습을 보여 왔다. 하지만 그 몇 번의 거친 모습보다 연희와의 재회 장면을 통해서 진짜 땅새의 내면을 보여주었다. 배역이 배우를 만들어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주어진다고 다 해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변요한은 땅새와는 아주 멀고 먼 한석율로부터 달려와 마침내 땅새로 설 수 있었다.

사실 육룡이라고는 했지만 워낙에 김명민, 천호진, 유아인, 신세경 등의 이름이 커서 상대적으로 땅새 변요한, 무휼 윤균상의 존재감에 대한 기대감이 작았었다. 무휼 윤균상은 이방원과의 사뭇 코믹한 장면들로 시청자와의 친밀도를 높이고 있다면 땅새는 이처럼 차가운 처절한 절망의 정서로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이들이 육룡이라는 사실에 조금의 의심도 남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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