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강동원을 볼 때 드는 감정은 남성들이 김태희를 볼 때와 비슷할 것이라고 짐작된다. 여심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마성의 매혹남 강동원이 몸매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타이트한 사제복을 입고 등장한다는 건, 평소 남성의 복장 페티시즘에 흥미 없던 여성이라 할지라도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치명적인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가톨릭 신부들이 구마의식을 행하는 것은 기존 한국영화에서 흔히 보던 소재가 아니기에 소재적인 면으로서의 접근이 참신한 영화가 <검은 사제들>이다. 이 영화는 비록 소재적인 면에 있어 <엑소시스트>에 빚지기는 했지만(이미 비슷한 소재가 나온 외화가 있기에 독창적인 소재는 아니다) 형사와 조폭, 멜로와 불치병 등 새로운 소재 찾기에 있어 한계에 다다른 한국영화의 소재 돌파라는 점에 있어 그 기상을 높이 사줄 만하다.

▲ 영화 <검은 사제들> 스틸 이미지
<검은 사제들>은 강동원이 연기하는 최부제의 정신적인 성장담 혹은 트라우마 극복기로 읽을 수 있다. 최부제는 어린 시절 사나운 맹견이 여동생에게 달려드는 바람에 여동생을 잃은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이다. 악마와 김 신부(김윤석 분)는 이런 최부제의 트라우마를 내버려두지 않고 건드리거나 꿈을 통해 괴롭힌다.

어린 시절 여동생을 잃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느냐, 혹은 트라우마에 잡아먹힐 것인가를 최부제가 선택하게 만드는 영화적인 상황은, 만일 이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검은 사제들>을 또 다른 면으로 본다면 강동원과 김윤석은 ‘고난 받는 의인’을 표상한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티칸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김 신부는 귀신 들린 부마자를 성추행하는 파렴치범으로 몰리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김 신부는 최부제에게 “이 길을 걷는다면 잠도 편히 못 자고 매일 술을 마셔야 할 거야”라는 경고를 남기고, 최부제는 김 신부의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구마의식을 돕는다. 다른 사람들과 가톨릭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지 않아도 악마 들린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인도적인 결의가 최부제와 김 신부 두 사람을 공고하게 단결하게 만들어주고 고난 받는 길, 오해를 받는 험한 길을 선택하게 만든다.

▲ 영화 <검은 사제들> 스틸 이미지
그런데 <검은 사제들>이 놓친 점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강동원과 김윤석이 필사적으로 구하려고 달려드는 귀신 들린 부마자 영신(박소담 분)에게 들어간 귀신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가를 관객에게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로마 교구는 부마자 영신을 살려두면 그의 안에 들어있는 악마가 한국을 위태롭게 할 테니 영신의 목숨을 박탈하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영신의 몸 안에 들어간 악마가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태로운 존재인가를 관객이 납득하도록 설득시켜야 하건만, 영화는 김 신부와 최부제의 구마의식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영신의 육신에 침투한 악마가 얼마나 치명적인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간과하고 말았다.

이를 동물원에서 탈출한 동물로 비유하면, 포획해야 할 동물이 사슴이나 양 같은 초식동물인지 아니면 하이에나나 늑대와 같은 육식동물인지도 모르고 포획하려 달려드는 사육사의 비애와 닮았다고나 할까. <검은 사제들>은 김 신부가 귀신을 퇴치해야 한다는 ‘고난 받는 의인’에 너무 포커스를 맞춘 나머지, 악마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납득시키는 데에는 실패하고 만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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