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일 <조선일보>에 뉴라이트전국연합이 ‘남산위의 저 소나무’라는 역사다큐드라마를 제작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인터뷰에서 “좌파정권 10년간 뿌리내렸던 자학적 역사관이 국민들 마음속에 우울한 자화상을 남기고 있다”면서 “대한민국 아버지 세대가 어떻게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제작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이 역사다큐드라마의 제작은 KBS <TV문학관>으로 유명한 장기오 PD가 주축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됐을까. 문화 연구자 홍성일이 찾은 답을 세 차례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뉴라이트전국연합이 한국현대사(1945년 해방~이명박정권 탄생)를 재조명하는 제작비 300억 규모의 100부작 다큐드라마 <남산위의 저 소나무>(가제)를 만든다고 한다. 그리 놀랍지는 않다. 이미 지난 칼럼(<강동순 녹취록 10대 예언>)을 통해 “보수적인 역사의 픽션화”가 진행될 것임을 예상한 바 있다. “대중적 기억을 상대로 방송을 무대화하며 치열한 좌와 우의 기억의 정치가 진행될 것”은 상식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간단히 바다 건너 일본만 살펴봐도 그렇다. 거대여당의 장기집권(자민당)과 미니야당(민주당)의 영구화, 그로부터 비롯하는 (만화, 영화, 드라마 등에서의) 우경화된 역사 해석은 우리의 ‘오래된 미래’처럼 보인다.

▲ 12월 2일자 조선일보 "뉴라이트, 드라마로 역사 바로세우기" 기사의 장기오PD
다만, 놀란 것은 해당 드라마의 연출자가 장기오 大PD라는 점이었다. 장기오 대PD가 누구인가. 대PD는 “KBS가 2000년 국내 최초로 도입한 제도로 독보적인 연출세계를 구축하고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제작에 임하는 프로듀서에게 부여하는 영광된 직위다.”(장기오(2002), 「TV 드라마 연출론」, 창조문학사, p. 337) 장기오 PD는 대PD란 직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순수문학을 영상으로 옮기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천재성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반평생 넘게 한 우물만 판 우직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 그에게 방송 연구자들은 텔레비전 제작자에게는 드문 ‘작가’란 칭호를 부여하길 주저하지 않았다.(김주환(2001), 텔레비전의 작가주의 -<TV문학관>의 장기오를 중심으로 , 프로그램/텍스트 2001년 4호,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주창윤(2001) 텔레비전, 작가, 작가주의, 프로그램/텍스트 2001년 4호,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장기오 대PD와의 인연

장기오 대PD는 기억을 못하겠지만, 개인적인 인연도 있다. 언젠가 그의 작품의 시사회 자리에 갈 기회가 있었다. 2006년이었고 작품은 유익서의 소설 <새남소리>를 원작으로 하는 <KBS HD TV 문학관-노래여, 마지막 노래여>였다. 한국의 아름다운 사계를 숨막힐 정도로 무서운 집념과 끈기로 아름답게 영상화한 작품이었다. 근대화·현대화 속에 사라져가는 전통 소리꾼의 숙명을 담담히 그렸다. 그 속에서 방송생활을 정리하는 장기오 대PD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내가 드라마에서 이런 소재를 다루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연합뉴스 , ‘TV문학관’ 수려한 영상으로 소리꾼의 운명적인 삶 다뤄 , 2006년 2월 28일)

그러다 우연히 장기오 대PD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필자가 다니는 학교의 야간대학원에 재학중이었던 것이다. 시사회에서 잠깐 스친 인연을 소중히 기억해주었고 <노래여, 마지막 노래여>의 DVD까지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새파란 젊은이를 친절히 대해주었고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을 잃지 않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언제부턴가 학교에서 볼 수 없었는데, 그 때 그가 우수한 논문과 함께 졸업했음을 알았다. 올해에는 수필집을 썼다는 소식도 지면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대체로 내가 느낀 장기오 PD는 문학을 사랑하는 순수함이 삶에서도 일관적인 분이었다. 그랬던 그의 소식을 다시 접한 것이 최근이다. 뉴라이트 역사다큐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다는 소식 말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뉴라이트에 장기오 PD의 이름이 함께 거론됨이 마뜩치 않았다. 물론 아직 기획단계에 있는 드라마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적절치 않음을 안다. 허나, 너무나도 생경한 소식에 도대체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응당 문화 연구자로서도 그에 대한 답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저명한 문화연구자 스튜어트 홀은 말했다. “일상적 생산 공정, 역사적으로 정의되는 기술적 숙련도, 전문 직업 이데올로기, 제도적 지식, 정의와 가정, 수용자에 관한 가정 등등에 관해 실제 사용되고 있는 지식이 이 생산 구조를 통해 프로그램 구성 방식의 틀을 정하게 된다… 이들(텔레비전 생산구조)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 문화적, 정치적 구조 내의 다른 소스나 다른 담론 구성체로부터 소재나 처리 방법, 의제, 사건, 인력, 수용자의 이미지, ‘상황의 정의’ 따위를 끌어온다.”(스튜어트 홀(1980/1996), 기호화와 기호해독, 한나래, p.290) 요는, 작가주의 PD로서의 그의 궤적과 그를 둘러싼 사회 문화적 배경을 꿰뚫어보아야 한다는 이야기겠다. 무엇이 그를 비상식적인 뉴라이트와 함께 하도록 만들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말이다.

▲ KBS 의 장기오PD가 연출을 맡은 "노래여, 마지막 노래여" 캡처ⓒKBS

장기오 PD의 정치색, 순수의 무채색에서 유채색으로

그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니 여러 기사와 그가 직접 쓴 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우선 올해 수필집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를 출판하고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한 <조선일보>의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은퇴하고 나니까, 딱 1편 빼곤 저에게 연출 의뢰가 들어오지 않더군요. 고리타분한 문예물 만들던 PD에게 누가 제작비를 대겠으며, 몸값 비싼 인기 탤런트들이나 잘 나가는 방송작가들이 제게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작품을 같이 하려고 하겠어요? 그래서 수필가로 나서기로 했지요”(조선일보, [박해현 기자의 컬처 메일] TV문학관 PD가 글쟁이로 나선 까닭은, 2008년 7월 14일)

그가 2004년에 은퇴했으니 그 딱 한 편은 아마도 <노래여, 마지막 노래여>인 것 같다. 현장에서 반평생 이상 보낸 장인에게 은퇴는 참을 수 없는 고역이었으리라. 피 끓는 창작열을 식힐 수 없었으리라. 차가워진 주변의 시선도 부담되었을 것 같다. 그랬던 그에게 수필은 새로운 출구였겠다. <TV 문학관>을 통해 순수 문학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바쳤던 그였다. 뒤늦은 등단은 그 연장선처럼 보였다. 수필집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에서도 “나는 수필이 가장 순수한 문학 장르임을 확신한다.”(장기오(2008),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도서출판 이유, p.7)고 적고 있다. 그런데 조금씩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순수와는 먼 세속의 때가 묻어 있다. 기사 중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읽을 수 있었다. 기자의 서술에 장기오 PD의 인터뷰가 섞여 있다.

“1980년 김동리의 <을화>를 기점으로 <TV 문학관>은 26년 동안 293편의 '문학과 드라마의 만남'을 내놓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매주 주말에 방영되던 이 프로는 2005년부터 ‘비정기 간행물’ 신세가 됐습니다. 방송사는 매년 10편씩으로 제작편수를 축소했습니다. 장 PD는 “이게 다 정연주 사장이 한 일이지요”라며 역시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의 방송장악 논란으로 한참 민감했던 전 KBS 사장 정연주씨의 이야기가 수필집의 출간 소식에 함께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에 정연주-장기오의 조합이 심상치 않다. 장기오 PD를 압축 설명하는 <TV 문학관>과 순수문학의 세계관과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쓴웃음은 어떤 의미일까? 기사의 마지막 부분으로 언급된 장기오 PD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지금 KBS에는 지난 10년 김대중·노무현 정권 아래에서 권력을 쥔 ‘젊은 기득권 세력’이 있습니다. 정연주 사장 퇴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늙은이들이라서 열정적으로 앞에 나서지 않지요. 뭐 곧 은퇴할 거니까요.”

갑작스레 나온 정연주 전 사장과 은퇴할 늙은이라는 자조적 표현은 장기오 PD에게 무언가 응어리가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또, 지난 10년의 ‘젊은 기득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혹시 이런 응어리가 그를 열정적으로 뉴라이트 앞에 나서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기사를 보니 아마도 그것은 다음에 대한 반응이었던 것으로 짐작되었다. 2004년 정년을 앞두고 그가 했던 인터뷰인데, 마침 그는 <TV 문학관 - 누구에게나 마음속의 강물은 흐른다>로 상하이 TV 페스티벌에서 매그놀리아 테크놀로지 대상을 수상했던 참이었다. 작품에 대한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저를 비롯한 방송쟁이들 이야기입니다. 거의 가정을 안 돌보고 일에만 매달려 왔더니 어느 순간 아내가 자기 인생을 찾아야겠다고 이혼을 하자고 그러네요. 또 조국근대화의 역군으로 평생을 바쳤더니 어느새 후배들한테 기회주의자 보신주의자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우리 5060 세대 이야기지요.”(연합뉴스, <연합인터뷰>정년퇴임하는 장기오 KBS 대PD, 2004년 6월 17일)

이즈음 되니 장기오 PD의 정치색이 순수의 무채색에서 유채색으로 조금씩 짙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주변인으로부터는 “KBS 드라마계의 순수파 거장”(정영주(2001), 창사 특집 TV 문학관 제 2TV ‘홍어’-낮고 느린 목소리로 들려주는 인생의 의미, KBS JOURNAL 2001년 2월)으로 불려지고, 스스로는 드라마 PD라는 직업에 대해 “생의 본질 탐구하는 속 깊은 관찰자”(장기오(2003), “생의 본질을 탐구하는 속 깊은 관찰자”, 「PD가 말하는 PD」, 부·키)라고 불렀지만 그는 가슴 속 응어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짐작컨대 소위 ‘젊은 기득권’과 이전 세대를 기회주의자로, 보신주의자로 매도하는 세상에 대한 울분 같다. 시청률의 이름으로 <TV 문학관>을 지워버린 세태에 대한 서운함 같다. 그렇다면 그가 보는 지금의 젊은 세대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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