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하는 12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은 ‘국정 교과서 반대’ 목소리를 내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근조 민주주의’, ‘근조 역사교육’이라는 대형 피켓을 들었고, 정부가 추진하려고 하는 국정교과서의 위험성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했다.

12일 오전 10시, 한국사교과서국정화네트워크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배후 청와대 규탄 기자회견 ‘아버지는 군사쿠데타, 딸은 역사쿠데타’> 기자회견을 열었다.

▲ 12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주최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배후 청와대 규탄 기자회견 ‘아버지는 군사쿠데타, 딸은 역사쿠데타’> 기자회견이 열렸다. ⓒ미디어스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등을 쓴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 씨는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행위는 반민족적, 반민주적 발상이면서 국가폭력이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와 시대에도 역행적인 아주 나쁜 행동”이라고 질타했다.

이이화 씨는 “첫 번째 주도자는 박근혜 대통령이고 하수인은 교육부 장관과 국사편찬위원장이다. 특히 국사편찬위원장인 김정배 씨는 전두환 때 2개 국정교과서를 쓴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김무성이라는 새누리당 대표가 있고 그 뒤에는 이인호를 비롯한 소위 뉴라이트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한국사 국정화를) 오늘 발표한다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방관자가 되지 말고 끝까지 나아가자”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차이석 씨의 후손인 차영조 씨는“독일이 과거의 나치에 대해 지금까지 반성하고 처벌을 진행하고 있는데 지금 대한민국은 과거 반성은커녕 오히려 친일과 5·16 쿠데타를 미화하기 위해 한국사 교과서를 채택하려고 한다”며 “(교과서가) 국정화될 경우 친일행위를 대한민국 근대화로 탈바꿈시키고 일제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궤변으로 자신들을 합리화하는 대신 독립운동 역사를 경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헌법을 위반하는 한국사 국정화 계획을 즉각 중단하라”고 밝혔다.

기자회견 장소에 검은 상복을 입고 나온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었다. 오늘은 역사계에 위기가 닥쳐온 날이기 때문”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2015년 10월 12일을 역사는 분명하게 기억할 거다. 한국 역사학, 한국 역사교육이 죽은 날, 한국 민주주의가 죽은 날이라고 역사는 분명히 기록할 것이다. 지금 청와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아버지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자마자 민주공화당을 만들었는데 민주공화당 상징이 소였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얘기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쇠귀에 경 읽기다. (국정 교과서가) 헌법, 국제사회 기준, 민주주의 원칙에 비춰 문제가 많다고 해도 듣지 않는다.

하다하다 안되니까 색깔론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기존 검정교과서를 통과시킨 것은 누구인가. 바로 박근혜 정권이다. 스스로 통과시켜서 2년 동안 교육현장에서 쓰인 교과서를 쓴 사람들이 종북 좌편향이라고 한다면 그걸 통과시킨 박근혜 정권은 종북 좌편향 정권인가. 검정을 맡은 국사편찬위원회 담당자들, 교육부 장관, 이 정권의 교육 정책 담당자 중 한 명도 ‘종북좌편향’이라고 기소됐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분명히 알고 있다. 권력과 정권의 역사는 유한하지만 역사학은 민주주의는 무한하다는 것을. 박근혜 정권은 이제 2년 남았다. 2년 뒤에 반드시 국정제에 다시 사망선고를 할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는다”

“부끄러운 역사도 제대로 가르쳐야”… 교육계도 우려 한목소리

정부는 단 두 차례의 공청회, 단 한 번의 설문조사로 국정교과서에 대한 모든 공론화 과정을 거쳤다는 입장이다. 또한 검정 교과서를 집필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교사들에게 ‘종북’ 딱지를 붙이는 등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학부모들도 국정교과서에 찬성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국정교과서 반대' 피켓을 들고 서 있다. ⓒ미디어스

변성호 전교조 위원장은 “국정화 교과서가 처음 만들어진 것이 바로 박정희고, 유신 시대인 1974년부터 시작됐다. 왜 국정으로 바꾸었겠나. 5·16 군사쿠데타를 국민들에게 눈가림하면서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박근혜가 역사쿠데타를 일으킨다. 오늘은 바로 그 역사쿠데타를 선포하는 날”이라고 일갈했다.

고유경 전국참교육을위한학부모회 수석부회장은 “학부모들이 언제 국정교과서를 찬성했느냐”고 반문했다. 고유경 부회장은 “저들은 자랑스러운 역사를,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유로 ‘국정화’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느 나라의 역사가 자랑스럽기만 한가? 치욕도 부끄러운 것도 역사다. 그걸 제대로 가르쳐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역사를 가르친다”며 “저는 학부모로서 우리 아이들이 그런 역사(국정교과서를 통한)를 배우고 그걸 가지고 이 나라를 이끌어갈 어른이 되는 것을 절대로 반대한다. 우리 아이들을 권력의 놀이감으로 삼지 말아주시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들은 기자회견 후, 청와대에 국정교과서 반대 서명을 전달했다.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에 이번 서명에는 따르면 총 1187개 단체에서 6만8428명이 참여했다.

다음은 성명 전문.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1.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오늘(12일)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한 뒤 ‘중등하교 교과용도서의 국·검·인정 구분안’을 행정예고한다고 한다. 정부가 “역사교과서 발행제도를 국정제로 전환하겠다”는 입장을 처음 밝힌 것은 2014년 1월 13일 당정협의회에서였다. 친일-독재를 미화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교육부의 전폭적인 엄호를 받아 우여곡절 끝에 교과서시장에 나왔지만 학교현장과 학부형들로부터 싸늘한 대저블 받아 채택률 0%대에 이르렀다. 이에 놀란 정부는 ‘교육부 편수기능 강화 방침’을 밝힌 데 이어, 이마저 못미더웠던지 아예 국정화로의 전환방침을 밝혔다.

2. 교학사 교과서 파동 당시 외국 언론이 주목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교과서와 관련해 아베 신조 총리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 사설은 아베 총리가 침략역사를 희석시키는 우경화 교과서를 만드는 데 압력을 가한다고 설명하면서, 박 대통령 역시 “한국인들의 친일 협력에 관한 내용이 교과서에 축소 기술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친일 협력행위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는 내용의 교과서를 교육부가 승인하도록 밀어붙였다”고 적었다.

3. 이어 뉴욕타임스 사설은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제국 장교를 했고 1962년부터 79년까지 남한의 ‘군사독재자’였다고 지적하였다. 침략을 미화하는 아베 총리의 할아버지가 전쟁범죄자라는 것과 교학사 교과서를 밀어붙이는 박 대통령의 아버지가 일제에 협력했다는 배경이, 한일 양국에서 ‘정치가 역사에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다. 정부가 “사실에 기초한 서술”, “균형 잡힌 역사인식” 등을 국정제로의 전환 필요성으로 내걸었지만 외국 언론은 친일-독재의 미화 내지 은폐가 국정제로 전환하는 것의 본질이라고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 정부의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서명에 시민 68428명이 참여했다. ⓒ미디어스

4. 교학사 교과서 파동 당시 새누리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도 “국정제도 하나의 관점만을 강요할 가능성이 높아 사실상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맞지 않다”며 국정교과서에 부정적 입장을 표명하였다. 여의도연구원이 펴낸 보고서는 “국정제를 채택하는 나라는 권위주의 내지 독재국가이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자유발행제나 인정제가 일반적”이라며 “국정제보다 검인정제, 검인정제보다 자유발행제를 채택하는 것이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헌법 이념을 고양할 것”이라고 밝힌 헌법재판소 결정문까지 인용했다. 보고서는 검정제로 발행한 고교 교과서 ‘한국근현대사’가 국정 교과서 ‘국사’보다 질적 수준이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을 소개하기도 했다.

5. 국가 주도의 단일한 교과서 즉 국정교과서는 국가가 필요 이상의 강력한 통제권과 감독권을 갖고 있어 헌법이 강조하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위배된다. 뿐만 아니라 “폭넓게 교과서가 채택되어 교사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UN의 역사교육 권고에도 반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가 단일한 역사교과서를 강요하는 것은 헌법정신과 국제인권규약의 여러 조항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

6. 정부가 국정화 여부를 9월 중에 발표한다는 소식이 나오자, 9월초부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목소리가 각계각층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현장 역사교사 선언과 서울대 역사학 전공 교수의 의견서 제출을 필두로 독립운동후손과 원로, 학부모, 시도교육감, 시의회, 각 대학 교수, 법학 연구자, 예비 역사교사, 학생, 해외동포 등 지금까지 총 6만 여명이 국정화 반대 목소리를 냈다. 학생들의 사고력을 획일화 정형화시키려는 교과서 국정화가 다원성 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한다는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늘 이 각계각층의 선언을 모아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공론을 무시하고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강행할 경우 전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2015년 10월 12일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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