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을 뒤돌아보기가 솔직히 버겁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던 1993년 이후 이렇게 역겨운 ‘정치적 퇴행기’가 또 있었을까? 혹은 IMF 이후 이렇게 구체적 생활의 위기가 우리 곁을 침윤해 들어온 해가 언제였던가. 조만간 명색이 연말이라고 오래간만에 만나게 될 지인들에게 이런 말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여하간 다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아닌 게 아니라 평소에 자식의 방만한 생활태도나 현실감각 떨어지는 행보를 늘 비판적으로 지적하시던 부모님께서도 요즘 전화를 드리면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이신다. 뭐 이런 고약한 시기에 참 고생 많다 이거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노릇이다. 여하간 인생이 보다 구체적인 꼴로 자리잡아가는 30대 중반을 참 드라마틱하게 넘기고 있는 것 같다. 줄곳 ‘우는 애 뺨치는’ 행보를 보이면서도 크게 별 탈 없는 1년 간의 대한민국 정부를 보며 특정정권에 대한 분노를 넘어 소위 민주공화정이란 상징체계로 미화되어 있는 근대 이후 정치권력의 무소불위함에 대한 근본적 회의감마저 드는 게 사실이었다.

▲ 크리스 웨버 ⓒchriswebber.com
여하간 올해의 스스로를 정리하지면 이런저런 내외부적인 것(주로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비롯된 정신적 공황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지독한 농구 팬으로서 농구를 끊을 수는 없었다. 이런 게 인생의 아이러니인 듯하다. 아무리 지독한 상황 속에서도 볼 건 보는 게 팬이다. 생각하면 어이없고 해괴한 노릇이지만 사실이다. 이와 아주 비슷한 장면을 이란 영화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1)에서 본 적이 있다. 이 작품은 1990년 이란에서 벌어진 대지진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그렸다. 십수년 전에 봤던 작품이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묘하게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 대재앙의 참화 속에서도 난민들이 기어코 안테나를 세워놓고 그 해 치러졌던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던 장면이다.

어린 시절 미군부대 근처에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난 스포츠를 포함한 대중문화에 있어서 팍스아메리카나 전략에 완전히 흡수된 일인이다. 10대 시절부터 근 사반세기 동안 야구, 농구 없는 일상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솔직히 말해서 수년 전까지는 WWE프로레슬링의 광팬이기도 했다.) 정치적 의식이 지금보다 훨씬 강성에 가까웠던 대학 시절에는 이것이 심각한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정치 문건을 쓰다가도 새벽이면 미군 방송으로 채널을 돌려 메이저리그 녹화중계를 찾고, NBA 챔피언결정전을 끝까지 보다가 집회에 늦기도 했다. 얼마 전 역시 축구광인 영국작가 닉 혼비의 축구애정고백서 <피버피치>를 읽으며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모른다. 세상에 나같은 미친 놈이 혼자가 아니라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노릇인가!

그런데 올해 농구를 보며 새삼 발견한 것은 약간은 씁쓸하고도 낯선 풍경이다. 그 발견을 던져준 것은 NBA의 명포워드였던 크리스 웨버의 은퇴다. 나와 동갑네기인 웨버가 세상에 얼굴을 내민 것은 아마 1991년 일 것이다. 미시건대 신입생이었던 웨버는 역시 같은 신입생이었던 주안 하워드, 제일린 로즈, 지미 킹, 레이 잭슨와 함께 1학년임에도 주전자리를 차지하며 NCAA(미국대학농구) 무대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팀을 준우승에 이끈다. 지금도 NCAA 팬들 사이에 회자되곤 하는 소위 Fab(Fabulous의 약자)5의 돌풍이었다. 이들의 등장은 단지 재능있는 1학년 다섯 명의 등장이 아니었다. 이후 농구코트를 장식하게 될 힙합풍의 긴 하의를 처음 선보였던 그들은 외양에서나 플레이스타일에서나 모두 신개념의 선수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튀었던 이가 웨버였다. 2미터8센티미터의 큰 신장의 센터였지만 그보다 훨씬 작은 선수들보다 더 빠르고 날랬으며 가드와 같은 시야와 포워드의 슛거리를 지닌 만능 플레이어였다. 거기에 미남형의 외모와 세련된 패션감각을 보여줬던 그는 그야말로 ‘엄친아’로 보였다.

▲ 크리스 웨버 ⓒchriswebber.com
NBA에서 그의 활약도 마찬가지였다. 1993년 프로 진출 이후 포워드로 전향한 그는 뛰어난 운동능력과 농구 센스를 보여주며 단박에 리그를 대표하는 영 파워 중 하나로 손꼽히기 시작했다. 그의 기량이 완숙해지기 시작했던 1990년대 후반부터 웨버는 팀 덩컨, 케빈 가넷과 더불어 리그 최고 포워드 자리를 놓고 경쟁한다. 특히 그 무렵 그가 자리잡았던 팀인 새크라멘토 킹스는 어시스트 코치인 핏 캐럴이 도입한 모션오펜스 전략으로 유명했던 팀인데, 그것은 웨버를 더욱 빛나게 했던 것이기도 했다. 특정 선수의 개인기량에 대한 의존보다는 팀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쉬운 슛 찬스를 창출해내는 전략인 모션오펜스에서 파워포워드임에도 슛거리가 길고 농구센스가 천재적이었던 에이스 웨버의 존재는 잘 짜여진 톱니바퀴의 모터와 같은 역할이었다. 비록 같은 시기 왕조를 구축했던 LA 레이커스에 밀려 단 한 차례도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킹스는 그 시기 가장 치명적 아름다움을 보여줬던 팀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찬란하기만 했던 웨버의 농구 인생 후반기는 굴곡의 연속이었다. 많은 뛰어난 농구선수들을 잡아먹었던 무릎부상이 문제였던 것이다. 특히 그와 같이 좋은 체격임에도 잘 움직이는 선수들은 이런 위협에 시달릴 확률이 더욱 높다고 한다. 신체구조적으로 일정한 사이즈 이상의 선수들이 강력한 운동능력을 보일 경우 신체의 내구성이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보다 젊은 농구팬들이 기억하는 웨버는 굼뜨게 움직이며 외각슛이나 던져대던 연봉 많이 받는 빅맨일 수도 있겠다. 특히 2005년 그를 상징하는 팀이었던 킹스를 떠난 이후 그의 말년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올해 3월, 그는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하고 농구 코트를 떠났다.

생각해보면 그는 리그 최고의 선수였던 적은 없다. 그럼에도 그와 함께 20대를 맞았던 나에게 그는 언제나 최고였다. 가장 강력한 팀의 강력한 선수가 아니었을는지는 몰라도 가장 아름다운 농구를 하던 팀의 가장 빛나던 선수, 지금 앞에서 보여주는 것 그 이상을 기대하게 만들어주던 선수, 그것이 그였다. 정말이지 언젠가 한번은 그가 자신이 이끄는 팀에서 정상에 서는 순간이 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지난 10년 이상 NBA에 미쳐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조용필 노래 가사를 빌려, 그를 마지막으로 나의 농구 청춘은 끝났다.

그러나 농구는 계속된다. 새로운 선수들은 등장하고 그들과 팬들은 농구라는, 어찌보면 아무 의미없는 공놀이를 통해 호흡을 같이한다. 물론 더 이상 웨버와 함께 했던 시기만큼 농구에 대해 열정적이지는 않다. 리그에는 모르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까마득히 어린 선수들이 농구계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난 여전히 농구를 보지만 빈도수가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며 새로운 선수들의 프로필을 찾아보려 애쓰는 일이 줄어드는 게 사실이다. 직접 코트에 서는 일은 더욱 드물고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게 농구는 농구다. 이제는 특정 선수나 팀, 혹은 리그를 떠나 공을 장대 끝에 매달린 바구니에 넣기 위해 다섯명의 선수들이 합심하여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좋아졌다. 모두를 위해 하나가 되고, 하나를 위해 모두가 움직이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염신규
자유롭고 예술적인 세상 만들기에 복무 중인 대책 없는 정신연령 낮은 30대. 현 민예총 정책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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