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사도> 포스터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는 소재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아들을 스스로 뒤주 속에 가둬놓고 생을 마감시킨,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의 극적인 요소와 배경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여러 차례 가공되어 왔다. 가장 최근에는 한석규와 이제훈이 각각 영조와 사도세자로 분하여 등장한 드라마 '비밀의 문'이 지난해에 방영된 바 있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소재이며 이미 확연한 결말이 정해져 있는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다시 한 번 스크린에 옮겨져 선을 보였다. '또 다시 사도세자 이야기야'하며 식상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만 주연배우와 연출자의 네임 밸류에 시선을 거둘 수 없게 만들었고, 개봉 전부터 과연 이번에는 어떤 형태로 사도세자 이야기가 다뤄질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대한민국 최고의 티켓파워와 연기력을 겸비한 배우 송강호와 차세대 배우그룹의 선두주자 유아인이 각각 영조와 사도세자로 등장하고, 2006년 사극 '왕의 남자'를 통해 천만감독 대열에 올라선 이준익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영화 '사도'의 기대치는 개봉 전부터 올라가 있었다. 여기에 문근영, 박원상, 김해숙, 전혜진 등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들이 조연으로 줄줄이 선을 보인다는 점도 '사도'의 작품성에 기대를 걸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영화 데뷔 이후 처음으로 정통사극에 도전한 송강호의 연기력이 어떻게 빛을 발할 것인지도 관심사였다. 최근에는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지나치게 과도한 픽션이 가미된 퓨전사극들이 여럿 선을 보였는데, 오히려 영화의 몰입을 방해하는 역효과를 일으켰다. 하지만 영화 '사도'는 기교를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이준익 감독은 묵직한 정공법을 통해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갈등을 넘어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8일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되는 영화 '사도'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어찌하여 사도세자와 영조 간의 관계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평생 콤플렉스에 시달리면서 결국 자신의 권위를 위협받는 것을 늘 못 견뎌하는 그리고 세심하다 못해 소심할 정도로 (잠을 청하기 전에 늘 귀를 물로 씻으면서 부정타는 것을 경계하는 모습) 자신의 권위 유지에 집착하는 영조의 캐릭터를 송강호는 능수능란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아들을 뒤주에 가두는 장면에서 만감과 분노가 교차되는 표정은 그 누구도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신의 경지에 다다른 연기력의 결정판이었다.

▲ 영화 <사도> 스틸이미지
어린 사도세자에게 큰 기대를 걸지만 오히려 그 기대가 사도세자를 짓누르고 급기야는 아버지에 대한 회한과 체념, 그리고 분노의 감정으로 돌변하게 되는 사도세자의 심경변화를 배우 유아인은 물 흐르듯이 표현해냈고 이를 통해 관객들의 몰입도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

누구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영화에서 전달하는 감동의 깊이가 다를 듯싶다. 필자는 사도세자의 관점에서 영화를 봤는데 아버지 못지않게 훌륭한 임금이 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하지만 오히려 그런 의지가 아버지 영조의 심기를 건드리는 상황으로 이어지면서 사도세자는 심약해져 간다.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불만은 가득하지만 자신의 아들 이산에 대해서는 늘 아버지로서 전할 수 있는 자상함과 애정을 쏟아 붓는다.

8일간의 에피소드에 집중하다 보면 영화는 어느 새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다다르게 된다. 그 순간 영조가 회한에 찬 목소리로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계였으면 어찌 이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라고 흐느끼는 장면에서 서서히 감정의 맥박이 빨라짐을 느끼게 된다.

어느 평론가가 이 영화에 대한 감상평에 오장육부로 울었다는 표현을 남겼는데, 그 표현이 바로 영화 '사도'의 감동 수위를 적절하게 나타낸 것이라 여겨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조(소지섭)가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남긴 용 그림이 새겨진 부채를 들고 춤사위를 벌이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주룩주룩 눈물이 흘러내리게 되었다. 아들에게만은 무한애정을 베풀었던 사도세자의 아쉬움과 회한이 정조의 춤사위를 통해 승화되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감동과 여운을 진하게 남겨준다.

▲ 영화 <사도> 스틸 이미지
이준익 감독의 기교를 배제한 묵직한 정공법식 연출은 송강호와 유아인을 비롯한 모든 배우들의 헌신과 더불어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처음으로 정극 사극에 출연한 송강호의 연기는 역시나 명불허전급이다. 표정부터 동작 하나하나에, 임금에 재위하는 순간부터 콤플렉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자식에게는 똑같은 전철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하는 애정이 집착 그리고 체념으로 변하는 과정을 담는다. 유아인 또한 늘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자신의 생각조차 제대로 펼칠 수 없었던 답답한 상황에 직면해있던 사도세자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베테랑'에 이어 이번 작품까지 유아인이란 배우의 존재감은 한없이 넓어지게 될 거라는 확신을 품게 만들었다.

너무도 뻔하고 흔한 이야기를 마음속에 울림이 일어나게 이끌어낸 이준익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력까지 '사도'는 모처럼 웰메이드 사극의 진수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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