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청산은 소련 지령에 의한 것’ 등 선명한 뉴라이트 역사관으로 선임 전부터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이인호 이사장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의미심장한 약속을 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최민희 의원이 KBS이사회 방청도 방통위 수준으로 해야 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회의 공개는 법으로 결정된 것”이라며 “물론 지금부터 공개를 해야 한다. 그렇게(방통위 수준으로 공개) 하겠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허원제 방통위 부위원장도 살펴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 관련기사 : KBS이인호 이사장, “방통위 수준으로 이사회 회의 공개하겠다”)

지난해 5월 28일 <방송법>이 개정돼 공영방송 이사회는 원칙적으로 ‘공개’하게 됐다. 하지만 KBS, MBC, EBS 모두 직접 방청을 할 수 없고 속기록 공개를 부분적으로만 허용하는 등 ‘무늬만 공개’ 방침을 세워 언론시민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이때 이인호 이사장이 △직접 방청 허용 △속기록 전체 공개 등이 포함된 ‘회의 공개’ 의사를 밝혔기에, KBS이사회의 공개 수준 개선 여부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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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열린 제828차 KBS이사회를 방청한 결과, 이인호 이사장의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이사회의 안건은 △경영평가서 이행요구를 위한 소위원회 구성의 건(공개) △후임 사장 임명제청을 위한 절차와 방법의 건 (비공개) 2개였다. 이사회 사무국 관계자는 회의 초반, 두 번째 안건은 비공개이므로 자동으로 TV중계가 꺼져 방청실에서 퇴장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여전히 ‘직접 방청’은 불가능했다. 자연히 ‘공개된 회의’를 방청하는 데 크고 작은 불편함이 뒤따랐다. 방청인들은 본관 6층에서 열리는 이사회 회의실과 거리가 먼 지하 1층 종합상황실에서 TV 화면으로 회의를 지켜봐야 했다. 저화질 카메라를 쓰는지 화면은 선명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멀리 잡아 얼굴을 식별하기조차 불가능했다.

별도의 자리배치표도 없었다. 이사들이 발언할 때마다 ‘ㅇㅇㅇ 이사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사무국 직원에게 누구인지를 물어야 했다. 목소리가 작을 경우에는 사무국 직원마저 누가 발언하고 있는지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음성도 나오지 않는 일이 두 세 차례 벌어졌다. 그 사이 이루어진 회의 내용은 ‘강제로’ 놓치게 된 셈이다.

더구나 이사회 사무국은 이사회 회의가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충분히 숙지해, 방청인들의 문의사항에 원활하게 답할 수 있는 직원을 두지도 않았다. 상황실에 동석했던 직원은 자신은 ‘방청’ 업무만 맡는다며 방청인들의 질문에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했으며 항의 수위가 높을 경우에만 전화 연락을 통해 이사회 현장 상황을 전달했다.

‘비공개 안건’ 다루기 전, 안건의 ‘공개/비공개’ 여부 논의하는데도 중계 끊어

가장 큰 문제는 회의 중반부에 일어났다. 첫 번째 안건이 의결되기 전, 야당 추천 장주영 이사는 10월 중에만 사장 선임 과정을 논의하기 위한 간담회(정식 이사회가 아니어서 공개 대상에서 제외됨)가 3번 예정돼 있다며, 10기 이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인 ‘차기 사장 선임’을 간담회로 진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을 냈다.

또한 재산관계서류 등 제출서류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주영 이사는 “(재산관계서류는 사장 후보가) 인사청문회에 가면 어차피 다 내야 할 것인데 그걸 이사회에서 보지 않고 그냥 (청문회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며“(차기 사장 검증은) 국회뿐 아니라 외부 언론사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굉장히 엄격하게 이루어질 것 같은데, 이사회가 서류도 안 보고 후보자를 추천하고 제청했느냐 하는 소리를 들을까봐 걱정이 된다”고 밝혔다.

야당 추천 김서중 이사 역시 “사장 선출 (절차 및 방법 논의가) 비공개로 되면 (밖에서는) ‘뭐 이런 것을 비공개하느냐’며, 결국 (KBS이사회가) 방송법이 정의하고 있는 이사회를 공개하라는 취지를 무슨 이유에선가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특정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라 ‘제도’를 논의하는 이번 안건은 공개로 논의하고 합의를 통해서 충분히 좋은 제도에 대한 결론을 얻었다고 밝히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두 이사의 발언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비공개로 되어 있는 두 번째 안건에 들어가기 전에 안건을 비공개로 두는 것이 적절한지 다시 따져보자는 제안이었다. 차기 KBS 사장을 어떤 방법과 절차로 거쳐서 뽑겠다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 안건의 ‘공개’, ‘비공개’ 여부를 두고 토론하는 상황인데도 TV중계 화면은 바로 꺼졌다.

방청인들은 두 번째 안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안건을 공개할지 여부를 가지고 다시 논의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중계가 중단돼서는 안 된다고 항의했으나 사무국 직원은 “이사님들이 비공개하기로 합의한 사안이고, 지금 두 번째 안건으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꺼진 것”이라고만 답했다. 방청인들은 문제제기 내용을 이인호 이사장에게 전달해 달라고 요구했고, 사무국 직원은 이사회 사무국을 통해 전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중계 중단을 판단한 주체가 KBS이사회인지 사무국인지를 묻는 질문에는 답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

이후, 뒤늦게 운영을 담당하는 직원이 내려와 “이인호 이사장님이 새로운 안건으로 가겠다며 타봉하신 것을 보셨을 것이다. 이미 비공개로 이사님들이 합의했기 때문에 비공개 상태인 것”이라며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사장님께서 (회의가) 공개되고 있는 거냐고 물어봐서 현재 비공개로 되고 있다고 말했고 이 사실을 이사들은 다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만약 공개를 하기로 결정한다면 그때는 회의가 다시 공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당 추천 이사들은 ‘어떤 제도를 도입하느냐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후보자들에게 유불리가 정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공개’ 제안에 반대했고 표결에 부쳐 결국 ‘비공개’ 안건으로 논의됐다.

방송법이 개정된 지도, 이에 따라 KBS이사회 규정을 변경해 이사회를 ‘공개’한 지도 1년이 지났으나 ‘이사회 회의는 공개한다’는 <방송법> 제46조(이사회의 설치 및 운영 등)는 내용 면에서도 형식 면에서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다만 △타 법에 의해 비밀로 분류되거나 공개 제한된 내용이 포함됐을 때 △명예훼손 및 정당한 이익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될 때 △감사·인사관리 관련 내용으로 공개할 시 공정한 업무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때 등 법률에 명시된 ‘예외’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공개’의 범위를 최소화하려는 움직임만 목격할 뿐이다. (▷ 관련기사 : 국감장에선 ‘공개’한다더니, 꽁꽁 숨기기 바쁜 KBS이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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