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마션> 포스터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의 희생이, 심지어는 그 희생이 여러 사람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위험하고 고단한 희생이라면? 리들리 스콧이 내놓은 영화 <마션>은 2013년 <그래비티>, 2014년 <인터스텔라>에 이어 관객의 가슴을 심쿵하게 만들 SF영화이다. 만일 <마션>이 재작년 <그래비티>와 작년 <인터스텔라>에 이어 흥행에 성공한다면 할리우드 SF 영화가 3년 연속 한국 영화계를 점령하는 진기록이 세워질 전망이다.

<마션>은 ‘연대’와 관련된 영화다. 화성에 예기치 못한 폭풍이 닥쳐 폭풍에 휩쓸려간 동료 와트니(맷 데이먼 분)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생존했다는 사실을 알고 지구로 돌아갈 귀환을 미루고 와트니의 동료들이 그를 찾으러 간다는, 잃어버린 동료를 찾으러 가는 연대의식과 관련되었다는 이야기다.

와트니의 동료들이 갖는 연대의식은 ‘죄책감’과 연관되기도 한다. 동료들이 사고를 만나 조난된 와트니의 시신조차 건지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와트니가 살아있다는 소식에 와트니를 구하기 위한 연대의식으로 발전하기에 말이다.

그런데 이들 와트니의 동료들이 갖는 연대의식은 단순히 동료를 구하는 차원에 머무르지만은 않는다. 만에 하나 와트니를 구하는 작전이 실패라도 한다면 와트니는 물론이고 우주선과 동료들의 목숨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SF 버전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된다.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의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딜레마가 영화에 내포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딜레마는 ‘공리주의’와 직결되는 문제로 바라볼 수 있다.

와트니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우주선의 모든 동료들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영화 속 상황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설파하는 공리주의의 가치관과는 들어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주선의 동료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각오를 하고 ‘와트니 구하기 프로젝트’에 돌입한다는 것은, 공리주의가 최상의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자 동시에 와트니를 화성에 홀로 남겨놓았다는 죄책감을 상쇄하기 위한 NASA와 동료들의 ‘속죄의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동료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을 상쇄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동료를 구하러 가는 살신성인으로서의 속죄의식 말이다.

▲ 영화 <마션> 스틸 이미지
그럼에도 우주선의 동료들은 물론이고 NASA와 해외의 많은 사람들이 와트니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쓴다는 설정은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보여주는 인명중시사상을 되새기게끔 만들어 준다. 이를 우리 사회로 적용해 보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영화 속 와트니 같은 ‘미생’에게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관심을 기울이고 그를 회생시켜 주기 위해 사회 구성원이 애쓰고 배려해줄 수 있나 하는 사회의 연대로도 확장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재난 상황에서는 얼마나 고귀한 것들인가를 반추하게 만든다. 우리는 X-레이를 찍는 것만으로도 방사능에 얼마만큼 노출되는가에 민감하지만 와트니에게 X-레이 정도의 방사능 피폭은 양반이다. 무더기로 방사능에 피폭되는 걸 감수하고 생존을 위해 플루토늄으로 몸을 따뜻하게 만든다.

소변은 버리는 게 당연하지만 화성에서는 물이 다이아몬드 이상으로 귀하기에 와트니의 오줌은 정수되어 다시 와트니의 목구멍 안으로 들어간다. 버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과는 반대로 화성에서는 ‘자원의 선순환’이 일어난다. 우리가 보잘 것 없게 생각하는 것조차 실상은 얼마나 우리 삶을 고귀하게 만들어주는 자원임을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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