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_ 과거 텐아시아, 하이컷 등을 거친 이가온 TV평론가가 미디어스에 새로 연재하는 TV평론 코너 <이주의 BEST & WORST>! 일주일 간 우리를 스쳐 간 수많은 TV 콘텐츠 중에서 숨길 수 없는 엄마미소를 짓게 했던 BEST 장면과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WORST 장면을 소개한다.

이주의 BEST : 빵 터진 박나래 한 명, 열 신동엽 부럽지 않다!
MBC <라디오 스타> (9월 23일 방송)

데뷔 10년차 개그우먼인데 어떻게 아직까지 예능에서 빵 터지지 않았던 것일까. 아무도 섭외하지 않았던 것인지 본인이 예능 출연을 자제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라디오 스타>가 ‘물건’을 발굴했다.

김구라가 “개그계의 탕아”이자 “못생긴 린제이 로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본인 스스로도 “안영미는 색(色)한 느낌이라면, 저의 섹드립은 그냥 더러워요”라고 인정했다. 창고 대방출 수준으로 에피소드를 쏟아냈던 박나래는 마치 신동엽의 능글맞은 입과 안영미의 거침없는 몸을 합쳐놓은 느낌의 게스트였다.

▲ 9월 23일 방송된 MBC <라디오 스타>

전날 방송에서 화제가 된 연예인이 다음 날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럼에도 박나래가 유독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시간이 길고 대중들로부터 호불호 없이 환호를 받은 건, 단순히 독한 19금 개그를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박나래는 동료의 비밀을 폭로하거나 남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로 웃음을 유발했다. 비록 박나래의 19금 개그가 더러울지라도 불쾌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다.

더 이상 성형수술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의사가 (수술대에) 더 누우면 거기는 너의 관속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 슬픈 고백. ‘나래Bar’ 네온사인까지 갖춘 집에서 미러볼과 사이키 조명을 켜고 놀다가 이웃 주민으로부터 불법 노래방 도우미 운영업소로 오해받았던 웃지못할 사건. 7살 연하 재미교포 남자친구의 어머니에게 돈 봉투까지 받았던, 그러나 정작 이별의 이유는 어머니가 아닌 주사 때문이었던 파란만장 러브스토리. 박나래가 꺼내놓은 에피소드의 범위는 태평양처럼 광활했지만, 그 안에는 타인을 향한 비난이나 조롱이 눈곱만큼도 들어있지 않았다.

MC들이 굳이 개인사를 건들거나 민감한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박나래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토크쇼에 임했다. 다음 스케줄이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하얗게 불태운 게스트도, 내일 출근하지 않을 것처럼 정신줄 놓고 마음껏 웃어본 <라디오 스타>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주의 WOSRT : 이 정도면 하소연이 아니라 헛소리
TV조선 <모란봉 클럽> (9월 19일 방송)

유독 종편 채널이 선호하는 장르가 있다. 바로 탈북 여성들이 집단 출연하는 토크쇼 혹은 리얼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북한판 비정상회담’을 표방하는 TV조선 <모란봉 클럽>은 보수적인 시청자, 그 중에서도 가부장적인 남성 시청자의 입맛에 철저히 맞춘 프로그램이다. 10명의 탈북여성 패널들은 내조 잘하는 것을 아내의 필수조건으로 여기는 순종적인 여성이고, MC 김성주와 지상렬은 그러한 패널들의 모습에 감탄하는 전형적으로 보수적인 한국 남자다.

지난 19일 방송된 <모란봉 클럽>에서는 ‘주말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남한 남성의 하소연을 주제로 토론을 했다. 토크의 방향은 자연스럽게 ‘집안일과 육아를 공동 분담해야 하느냐, 전업주부가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하느냐’로 흘러갔다. 10명의 탈북여성 중 7명은 남한 남성의 하소연에 동의했고, 나머지 3명도 “아내가 전업주부라면 당연히 집안일을 전담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했다.

▲ 9월 19일 방송된 TV조선 <모란봉 클럽>

케케묵은 토론 주제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토론을 풀어가는 출연자들이었다. 특히, “육아는 자기가 행한 행동(결혼 후 전업주부로 사는 것)의 결과인데, 힘들게 일하고 온 남편에게 주말까지 애를 보라고 하는 건 가혹하다“는 박성애 패널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여성이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집안일을 도맡겠다는 뜻이지, 육아까지 전담하겠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육아는 아내가 전업주부든 맞벌이 부부든 절대적으로 공동 책임이어야 한다.

다음 토론 주제는 더욱 가관이었다. <모란봉 클럽> 제작진은 ‘나는 맞벌이 부부일지라도 남편의 아침밥은 꼭 차려주겠다’는 주제를 제시했고, 탈북 여성들은 만장일치로 당연히 차려줘야 한다고 대답했다. 지금 다시 <사랑과 전쟁>이 부활한다고 해도 이런 해묵은 주제는 절대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남녀의 가사 분담에 대해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한 탈북 여성 패널도 있었다. 정은심 씨는 “저는 (남편들이) 그걸 왜 도와준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아무도 정은심 씨의 지적에 반성하거나 뜨끔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성주는 끝까지 “그래도 북한 남성들보다 남한 남성들이 더 자상하다”며 남한 남성들을 두둔하고 나섰다. 한유미 씨가 ‘주말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남한 남성의 하소연에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김성주는 “한유미 씨는 북한 남편과 결혼했기 때문에 저렇게 하소연하시는 거다”라고 단정 지었다.

어쩌면 “남편을 떠받들고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고 생각하는 탈북 여성들의 가치관보다 더 낡은 건, 집안일과 육아를 여전히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남한 남성 MC들의 가치관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모란봉 클럽>은 상대적으로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오랜 시간 살아 온 탈북 여성들의 가치관을 방패삼아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낡은 가치관을 주입시키려는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면 하소연이 아니라 헛소리다.

이가온 / TV평론가
웹진 텐아시아와 잡지사 하이컷을 거쳐 지금은 프리랜서로 활동 중. 회사를 퇴사한 후에도 여전히 TV를 놓지 못하고, TV평론으로 밥벌이하는 30대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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