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신문사들도 지상파 진출 의지가 없는 것 같다.”
“방송3사가 가지고 있던 영향력이 정치적으로 분산되는데, IPTV 시대가 되면 지상파가 급속도로 해체가 된다. 지상파 진입의 매력을 잃고 있는 것이다.”

▲ 정병국 한나라당 미디어산업발전특별위원장 ⓒ여의도통신
정병국 한나라당 미디어산업발전특별위원장이 지난 3일 지상파 방송과 종합편성/보도전문 채널 등 보도를 통한 여론 형성 기능을 보유한 방송의 소유를 제한하고 있는 현행 대기업 기준을 아예 없애고, 신문의 방송 진출만을 일방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을 담은 방송법/신문법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쏟아낸 설명들이다.

한마디로 미디어 환경 변화 때문에 지상파의 영향력이 계속 줄어들고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왕창 풀어도 된다는 게 정 의원, 아니 한나라당의 논리다. 그렇게 해도 “여론이 집중될 수 없다”고 정 의원은 단언한다. 정 의원 논리대로 한다면, 점점 더 매력을 잃어가고 IPTV 시대에 급속도로 해체되고 있는 지상파 방송으로서는 자신들에게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거대 신문이나 재벌 대기업들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할 판이다. 투자 가치가 없는데 돈을 쏟아붓겠다고 나서는데 이보다 더 고마울 수가 어디 있겠는가?

이 ‘간악한’ 논리, 충분히 이해한다. 무릇, 정당의 기자회견은 전달하는 메시지가가 분명해야 하고 단순해야 한다. 그래야 잘 먹히기 때문이다. ‘지상파 방송 해체되고 있으니 왕창 풀어도 여론 집중 우려 없다!’는 논리는 사실 여부를 떠나 참 단순명쾌하다. 행간을 읽으면, 재벌 대기업들과 거대 신문들을 졸지에 ‘백기사’로 둔갑시키는 연금술 효과까지 발휘하니 언론계 은어로 ‘참 야마(주제) 한 번 잘 잡았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기자들이 완벽하게 속았다. 정 의원과 한나라당이 미디어 소유와 관련된 대기업 기준 자체를 아예 폐지했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그 어떤 기자 한 명도 한나라당 보도자료를 보고 나서 ‘지금도 지상파 방송과 종합편성/보도전문 PP에 대해 방송법 시행령 개정 이전에는 자산 규모 3조원, 바뀐 뒤에는 10조원 이하 대기업은 30%까지 소유할 수 있다. 그런데 대기업 소유가 금지돼 있으니 20%까지 지상파 방송 소유하게 하고 49%까지 종합편성/보도전문 PP 소유하게 한다는 의미가 뭐냐?’고 묻지 않았다.

▲ 3일 한나라당 ‘미디어산업 발전 특별위원회’가 언론 관련법 개정안 발의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어 법안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정 의원과 한나라당의 간악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미디어 소유의 대기업 기준 폐지를 교묘하게 은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지난 2일 한국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토론회에서 한나라당의 방송법 개정안을 미리 소개한 한 학자에게 필자가 이 질문을 던지자, 이렇게 말했다. “미디어 소유 대기업 기준 없애자는 거라고 알고 있어요. 이제 없앨 때도 되지 않았나요?” 너무나 중요한 얘기를 이렇게 애매하게 은폐하는 방식으로 발표하는 한나라당이나, 소신 여부를 떠나 그런 애매한 공개 방식을 아무런 여과 없이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학자나 ‘정당한 공론화’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십중팔구, 정 의원과 한나라당은 기자들 탓을 할 것이다. ‘기자들이 눈치 못 챈 것’이라거나, ‘대부분 기자들이 내용에 동의했으니 질문하지 않은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은근슬쩍 미디어 소유 대기업 기준 자체를 폐지해버리는 정 의원과 한나라당의 모습 속에서 필자는 ‘악(惡)의 진부화’를 발견한다. 몰상식하고 몰염치한 짓들이 자주 자행되는 것을 보는 데 익숙해진다는 얘기다. “악이 민주적인 사회를 포함하여 모든 사회 속에 평범하게 존재하는 것, 우발적이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의식적/고의적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체계의 규범이 돼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악의 진부화이다. 현 정권에서 널리 확산되고 있는 이런 ‘악의 진부화’의 핵심에는 다음과 같은 오만이 똬리를 틀고 있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
‘여론 다양성이 밥 먹여 주냐?’

기준 자체를 없애면서까지 재벌 대기업에 지상파까지 가져다 바치려 하면서 “여론이 집중될 수 없다”고 단언하는 정도의 뻔뻔스러움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는 없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필승을 하기 위해선 우호적인 여론 환경을 조성하고, 자신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야 하는 거대 신문들이 등을 돌리지 않게 하기 위해선 둥근 것도 네모나다고 우겨야 한다. ‘신뢰’ 바닥 상태의 대한민국에서 지방선거 이전에 경제가 바닥을 치지 않을 위험성까지 감안하면 입맛에 맞는 우호적인 여론 환경을 적극 조성하는 것 이외에 현 정권이 할 일은 없다.

2006~2007년 시사저널 사태 당시 재벌 대기업 삼성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망각하지 않고 있는 시민이라면, 재벌 대기업에 대한 지나친 광고 의존도로 신문의 논조가 일상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는 현실에 눈을 감지 않는 시민이라면, 정 의원처럼 지상파 방송의 영향력과 콘텐츠 경쟁력을 폄훼하며 현실을 호도하지 않는 시민이라면, 미디어 소유 대기업 기준 자체를 폐지하려는 한나라당의 계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밥을 먹여 주진 않는다. 맞다. 여론 다양성이 밥을 먹여 주진 않는다. 맞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여론다양성은 대한민국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준다. 대통령과는 달리, ‘신브레턴우즈 체제에 동의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사람들을 늘려준다. 누군가에게 속았거나 조종당했거나 이용당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개인의 자존감에 주는 무게가 결코 배고픔에 못지않음을 알 것이다. 다행히 필자는 대한민국에 아직 속한다고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얼마나 그럴 수 있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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