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이란 단어 때문에 독자들이 거리감을 두지 않도록 최대한 글을 대중적으로 기술했음을 밝힌다. 하나 더, 정신분석으로 ‘에쿠우스’를 바라볼 때 프로이트의 개념으로 풀지 않고자 노력했음을 밝힌다. 필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서구에서는 이미 이 작품을 프로이트의 개념으로 해석한 글이 상당수 되기에, 프로이트의 개념으로 ‘에쿠우스’를 분석했다가는 70년대 서구의 평론가들이 분석한 분석 방식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판단해서 이 글에서는 다른 정신분석의 방법으로 두 작품을 바라보고자 한다.

프로이트의 개념이 아니라고 해서 상상계-상징계와 같은 개념을 끌어들이면 이 글을 모두 읽기도 전에 접을 것이 우려되기에, ‘아버지의 율법’ 하나만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에쿠우스’의 알런 스트랑은 ‘아버지의 권위’에 주눅 들린 주인공이다. 어린 시절 말을 타고 뛰어 놀고는 싶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 타는 걸 위험하다고 방해하는 바람에 알런이 말을 타고 싶어 하는 욕구, 프로이트의 개념으로 본다면 ‘이드’는 방해받는다. 말을 타고 싶은 욕망이 부모의 간섭이라는 초자아, 혹은 ‘아버지의 율법’에 짓눌려 알런의 욕망은 균열되고 상처 받는다.

▲ 2015 ‘에쿠우스’ 서영주-유지은 ⓒ극단 실험극장
알런이 아버지의 율법에 짓눌리는 건 이게 다가 아니다. 질 메이슨과 육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싶어 마구간으로 갔을 때 알런이 말의 환영에 시달리는 건 아버지의 율법에 시달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알런의 어머니가 믿는 종교에서는 결혼하기 전에 이성과 육체적인 접촉을 맺는 것은 죄라고 규정한다.

부모가 말을 타지 못하도록 방해한 아버지의 율법이 어머니가 믿는 종교의 정언 명령,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과 결부되어 마구간의 알런을 괴롭힌 거라는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말해 알런은 어려서뿐만 아니라 커서도 아버지의 율법에 시달린 나머지 이성과의 육체적인 교제는 말할 것도 없고, 알런이 사랑하고 숭앙하던 말의 눈을 찌르는 반사회적 행동을 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의 율법에 시달리는 주인공은 ‘에쿠우스’의 알런뿐만이 아니다. ‘택시 드리벌’의 주인공 덕배는 고향에 사랑하는 여자 화이를 남겨두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젊은이다. 덕배가 서울로 상경할 당시 화이는 덕배의 아이를 배속에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화이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덕배는 모르고 있었다. 화이가 잘못되고 나서야 화이가 임신한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 연극 ‘택시 드리벌’ 박건형, 김수로, 강성진, 임철형 ⓒ아시아브릿지컨텐츠
하루는 덕배가 밤에 젊은 남녀 손님을 태운다. 이들은 택시를 모텔로 착각하는 듯 앞의 운전자는 나 몰라라 하고 서로 물고 빠는 데에 정신이 없다. 그런데 이들 손님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고향에 두고 온 화이의 죽음과 임신한 아이의 죽음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손님으로부터 전해 듣는 것이다. 화이의 임신과 죽음에 대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덕배는 손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화들짝 놀란다.

사실 뒷좌석 손님들은 덕배의 숨겨진 사연에 대해 알 턱이 없다. ‘에쿠우스’의 알런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율법’이 덕배에게 투사된 탓에 덕배가 환청에 시달린 것이다. 덕배가 고향을 등지고 떠나지만 않았다면 화이와 뱃속의 아이가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무의식 속 죄책감이, ‘아버지의 율법’이라는 죄책감을 재확인하는 징벌의 형식으로 손님의 입을 통해 나타나 덕배를 괴롭힌 탓이다.

이렇게 ‘에쿠우스’ 속 알런과 ‘택시 드리벌’의 덕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율법에 삶이 질식당하는 가련한 주인공이다. 대학로에서 열리는 공연은 하루에만 백 편을 상회한다. 그 가운데서 ‘에쿠우스’와 ‘택시 드리벌’은 필자가 최근 본 공연 가운데서 ‘아버지의 율법’으로 분석 가능한 연극이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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