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극한직업>이라는 방송프로그램이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는데, 고압선에 올라가 일하는 모습 등을 볼 때에는 정말 살벌하더라. 그런데, 저는 방송내용보다는 그 모습을 찍고 있는 동료들을 생각한다. 동료들 역시 고압철탑에 올라가 극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앵글을 잡고 찍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EBS <극한직업>을 볼 때마다 그 프로그램을 만드는 PD 역시 극한 직업군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다…(중략)…저희 집에 수중 카메라 관련 장비가 있고 최근에는 드론도 구입했다. 방송사에서 지급하는 평균제작비 가지고는 수중촬영, 드론 전문가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분업돼 있던 일들이었는데 지금은 독립PD들이 기획에서부터 운전, 촬영, 편집보조 등의 모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노동강도는 갈수록 세 지는데 제작비는 삭감되거나 정체수준이니 말이다. 방송사들이 제작비가 상승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직격탄을 맞는 곳은 외주제작사이고 독립PD들이다.”
독립PD들의 ‘노동실태’가 얼마나 최악의 상황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한국독립PD협회 복진오 권익위원장의 하소연이다. MBN 본사 PD가 외주제작사 소속 PD를 폭행한 사건 이후, 독립PD들의 ‘노동인권’에 대한 언론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작가의 하이힐에 소주를 받아 마셨다”, “말대꾸 했다가 뺨을 풀스윙으로 맞았다”는 등 인권침해를 당했다는 증언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김환균)과 한국독립PD협회(회장 이동기)는 공동으로 독립PD 노동인권 긴급실태조사를 실시해 결과를 발표했다.
“독립PD의 월평균 수입은 표준생계비의 2/3…그마저도 체불비율은 64.4%”
17일 열린 <독립PD 노동인권 긴급 실태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이만재 활동가는 “한류로 상징되는 방송콘텐츠산업은 정부의 최우선 국정운영 전략인 ‘창조경제’의 핵심산업으로 지목되고 각광받고 있지만 콘텐츠 제작인력은 대부분 열악한 노동환경과 불안정한 고용관계 속에서 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립PD들 다수가 프리랜서로서 고용불안정과 함께 인권침해에 노출돼 있다는 지적이다. 이번 설문조사는 한국독립PD협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 형식을 통해 진행됐다. 이는 회원 281명에게 전달됐으며 175명이 응답했다.
이번 설문조사 결과에는 논란이 됐던 ‘인권침해’ 사례의 심각성도 드러났다. ‘인격무시’ 발언을 들은 독립PD 비율은 전체의 84.6%나 됐고 ‘욕설’을 들어봤다고 답한 독립PD 역시 전체의 61.0%나 됐다. ‘폭행’을 당한 경우도 17.7% 있었다.
여성 독립PD의 경우, ‘성폭력(희롱·추행 포함)’을 당했다는 비율이 87.5%에 달했다. 성폭력의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프로그램 제작시 노래방 등에서 분위기를 맞춰야 했다”, “일상인 성희롱과 남자PD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응답이 나왔다. 이만재 활동가는 “성폭력의 경우, 너무 적나라한 내용들은 보고서에 담지 못할 정도였다”며 “다른 직종보다도 독립PD들의 인권침해가 심각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직종별단체에서 윤리강령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관계 당국의 지속적인 감시와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독립PD들, 이제 노동조합 만들어야 할 때…독립PD인권보장선언 마련 중”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조직된 힘으로 대응을 해야한다는 주장도 쏟아졌다. 한국독립PD협회 이동기 회장은 MBN 폭행사건과 관련해 “당시 규탄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 일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짐작도 못했다”며 “언론노조와 한국PD연합회 등 유관단체들과 함께해서 MBN으로부터 사과까지 얻어냈다. 이게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국언론노동조합 김환균 위원장은 “이제는 독립PD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을 만들어야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환균 위원장은 “다양한 정책 대안이 나왔는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단결되고 강력한 연대가 필요하다”며 “이 자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위한 첫 걸음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 시작하지 않으면 MBN사태에서 보듯 일이 터진 다음에야 뒷수습을 하는 것으로 머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언론노조는 향후, 방송작가들의 노동인권 실태조사에 나설 계획이다.
한국PD연합회 안주식 회장도 “궁극적으로 노조 설립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며 “그에 앞서 우리는 한국독립PD협회와 독립PD인권보장선언(가)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선언에는 방송사와 제작사 및 독립PD들과의 계약서, 성폭력, 폭행·폭언, 협찬, 등이 상세하게 기입돼 KBS와 MBC, SBS, EBS 4대 지상파를 다니면서 확답을 받으려고 한다”며 “향후, 이런 내용들이 방통위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한국독립PD협회 복진오 권익위원장은 “무계약 상태의 방송프로그램이 제작되는 환경과 협찬 및 전파사용료 등에 대한 기준 마련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며 “무엇보다 방통위 등 법적기관부터 정밀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상파에서 전파사용료 명목으로 40~50% 수준까지 협찬비를 떼어간다”며 “여기에 해당 프로그램에 대한 별도의 광고를 붙이고 있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이중수익을 얻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갑의 위치에 있는 분들이 알아서 불공정 계약에 대해서도 해결에 나서줬으면 좋겠다”고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