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공익법인을 설립해 직업병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하자”는 ‘삼성반도체 직업병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을 거부하고 지난 3일 보상위원회 발족을 일방 선언했다. 이에 대해 반올림과 참여연대 등은 물론 피해자 가족들 또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나 언론은 이를 ‘몽니’라고 비난했다. 언론은 ‘삼성이 공익법인에 출연한 돈을 시민단체가 쓸 것이다’며 근거 없는 마타도어까지 살포하고 있다.

‘공익법인 설립’을 제시한 조정위원회는 애초 삼성과 가족대책위의 합의로 만들어졌다. 지난해 5월14일 삼성전자 권오현 부회장은 직업병에 걸려 투병하거나 숨진 직원과 그 가족에 대해 소홀한 부분이 있었다며 공식 사과했고 ‘합당한 보상’을 약속했다. 당시 삼성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제3의 중재기구 구성’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혔고, 가족대책위는 ‘제3의 조정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삼성과 반올림은 이를 수용했고 김지형 전 대법관 등이 참여한 조정위는 지난해 말부터 보상방안 논의를 시작해 올해 7월23일 권고안을 제시했다.

조정위는 보상, 대책, 사과를 3대 과제로 제시하고 이를 제3의 사회적 기구인 공익법인을 설립해 해결하는 방식을 삼성에 권고했다. △삼성이 천억원, 한국반도체협회가 적정 액수를 기부해 공익법인을 만들고 △이곳에서 보상 원칙과 기준을 마련해 대상질환을 3가지 종류로 구분해 보상하도록 하는 게 조정위 권고안의 핵심내용이다. 조정위는 이밖에도 △재발방지 및 향후 사업장 관리 대책을 위해 먼저 삼성전자 내부의 안전보건 관리시스템을 강화하고 △법인 내 옴부즈맨 제도를 도입하고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사과문을 낭독하고 삼성이 노동건강인권 선언을 하도록 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그러나 삼성은 9월3일 돌연 ‘반도체 백혈병 문제 해결을 위한 보상위원회’를 발족하겠다고 선언했다. 삼성은 전문가 위원 4명, 가족대책위, 회사 대표, 노동자 대표 등 총 7명으로 보상위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유가족을 설득해 직업병 문제를 ‘공론화’하지 않고, 보상위원회에서 ‘보상금액’으로 문제해결 범위와 자체 재발방지 대책을 만들 수 있는 길을 만든 것이다.

이에 반올림은 7일 피해자 가족 55명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이 사회적 약속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보상위 발족을 추진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삼성의 보상위원회는 사과, 재발방지 대책을 뒤로 하고 오로지 보상으로 삼성직업병 문제를 풀려는 수단”이라며 “또 (문제를) 삼성의 통제 범위 내에 두려는 꼼수”라고 지적했다. 삼성이 보상위원회에 참여시키겠다는 전문가들은 지금껏 직업병 인정을 방해해온 인사들이고, 가족대책위 변호사는 6명의 가족만을 대표할 뿐이라는 게 반올림과 피해자 가족 55명의 주장이다. 백혈병으로 숨진 노동자의 유족은 9일 삼성본관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시민사회단체들의 기자회견도 잇따르고 있다.

▲ 15일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 (사진=참여연대)

삼성의 일방통행으로 논란이 일자 시민사회와 정치권 또한 이 문제에 발언하기 시작했다. 참여연대는 14일 <‘사회 위에 군림하는 삼성’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라는 입장을 통해 “스스로 요청해 구성된 조정위의 조정안조차 거부하는 태도는 삼성이 우리 사회의 건전한 구성원이 될 의사가 없다는 것, 돈의 힘으로 시민을 기만하고 노동자를 약탈하고 인권을 짓밟으며 이 사회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남겠다는 의사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 또한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언론은 삼성의 입장을 대변하며 이 같은 문제제기를 봉쇄하는 데 집중했다. 한국경제 산업부 김현석 기자는 15일자 신문 15면에 실린 <시민단체가 피해자 보상보다 공익법인에 더 집착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현장기자 칼럼에서 반올림과 참여연대가 공익법인 설립에 ‘집착’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공익법인의 사무국, 하부조직, 상근 임직원 그리고 300억원의 운영비’ 같은 ‘잿밥’과 연결했다. 김현석 기자는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도 고쳐 쓰지 말라’는 속담을 인용하며 참여연대와 반올림을 비난했다.

헤럴드경제는 14일자 13면 기사 <시민단체 ‘몽니’에 삼성전자 골머리>에서 “‘반도체 경쟁력’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삼성전자가 한 시민단체의 몽니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시민단체가 삼성전자와 대립각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부 과장된 악성정보가 글로벌 비정부기구(NGO) 네트워크에 공유되는 등 대외 이미지 악화로 인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헤럴드경제는 몽니를 부리는 시민단체로 ‘반올림’을 지목하면서 반올림이 한국 주재 외신기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행사 또한 문제 삼았다. 헤럴드경제는 “삼성전자와 가대위의 직접 협상이 시작되면서 긴 시간을 끌어온 ‘직업병 논란’도 마무리되는 분위기”라며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위해 정부지원을 쏟아붓는 상황 속에서 국내 반도체 산업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일이 더 이상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재계 관계자’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 한국경제신문 15일자 15면 기사(왼쪽)와 헤럴드경제 14일자 13면 기사.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는 16일 <지켜야 할 선을 넘은 일부 언론의 삼성 직업병 관련 보도>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고 한국경제신문과 헤럴드경제의 보도 내용을 정면 비판했다. 참여연대는 “언론이 문제의 핵심을 왜곡하고, 반도체 직업병 문제에서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반올림에 대한 악의적 흠집내기에 나서고 있다”며 “보도자료를 낸 당사자에 대한 기초 취재도 없이 쓴 이런 기사는 사회적 흉기가 되어버린 언론 현실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참여연대는 “참여연대는 이 문제에 대해 개입할 자격과 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조정위가 권고한 공익법인 설립과 운영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지 않겠다는 내부 의사 결정을 내린 바 있다”고 밝혔다.

참여연대는 “한국경제신문은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도 고쳐 쓰지 마라’는 속담을 인용해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를 비판했다”며 “이 속담이 누군가를 겨냥한다면 그 대상은 시민단체가 아니라 오히려 언론에 가깝다. 언론은 삼성의 광고라는 일상적인 ‘오얏나무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은 이 속담을 자사에 적용해 삼성 광고를 일절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참여연대는 “참여연대가 조정위의 권고안 수용을 촉구한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결 방식이고, 미흡하나마 가해자의 진솔한 사과와 실질적 보상 그리고 재발방지대책 마련이라는 기초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지금 삼성은 자기들 입맛에 맞는 위원들로 구성된 보상위를 구성하고 보상의 범위와 수위를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피해자들의 궁박한 처지를 이용해 가해기업인 삼성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라 일사천리 보상으로 이 문제를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만 읽힐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삼성 반도체 직업병 문제는 ‘세계일류기업’ 삼성전자의 작업장에서 일한 죄로 불치의 병을 얻고 죽어간 수많은 피해자들의 원한과, 차마 살아있다 말할 수 없는 꽃다운 청춘들의 망가진 인생과 그 가족들의 비통함이 서려 있는 문제”라며 “사회는 그들의 원한을 풀고 비통을 덜어줄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사회적 약속을 만들 의무도 있다. 사회적 공기를 자처하는 한, 언론도 그럴 의무가 있다”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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