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종종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서는 비평이 필요하다. '정치 멀리보기'는 분명한 관점과 과감한 전망을 바탕으로 정치적 사건을 전체 맥락에서 재구성하고자 하는 심층 기사이다. 3류 정치평론처럼 소설의 영역으로 가보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근거 있는 정치평론의 도를 추구한다.

그림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가 형성되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물론 이 기대는 누군가에게는 낙관을, 누군가에게는 치욕적 감상을 남길 것이다.

보수언론이 종편을 통해서는 호들갑을, 신문 지면을 통해서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청와대가 바라는 그대로, 종편과 일부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중국이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하였는지에 대해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신문의 지면에서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대통령의 이번 방중에 대한 ‘우려’를 표현했다. 특히 2일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회담 이후 그간 중국이 공식화해왔던 것보다 진전된 북핵 문제에 대한 입장이 없다는 데에서 이들의 우려는 극에 달했다. 쉽게 말하면 그 정도도 얻어내지 못할 거였으면 거긴 뭐하러 갔느냐는 식이다.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의 모습을 보면 이들의 ‘불쾌감’이 어디서 연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대개 구 공산권 국가들이며 인도와 한국 정도가 들러리를 서는 모양새다. 시진핑 국가 주석 옆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서고 다시 그 옆에 박근혜 대통령이 선 형식 역시 이런 상황이 반영된 걸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의 옛 친구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 더 낀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금빛 의상은 이런 모습에 위화감을 더했다. 아마도 이 광경이 미국 언론에 주요하게 보도되면 중국에 대한 노골적 반감을 부추기고 있는 일부 인사들이 나서 한국까지 묶어 싸잡아 비난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보수언론의 지면에 심심찮게 표현됐다.

▲ 박근혜 대통령이 3일 오전 중국 베이징 톈안먼에서 열린 '항일(抗日)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전승절) 기념행사에서 자리에 앉아 관람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중국이 열병식 현장에서 최첨단무기를 전시한 것도 미국과 동맹국들에게는 불안감을 주는 요소다. 중국은 이번 기회를 빌어 둥펑-31A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항모킬러’로 불리는 DF-21D미사일을 공개하였는데, 이러한 무기들은 미국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거나 미국 본토에 인접한 거리 정도까지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무기들이다. 시진핑 주석이 기념 연설에서 인민해방군 병력 30만 감축을 선언한 것은 나름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병력의 숫자 외에도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 현대전의 특징을 고려하면 중국이 이날 공개한 무기들이 서방국가들에 위협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때문에 국제사회에 박근혜 대통령이 ‘어울리지 않는 손님’ 행세를 하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하기 위해 상당한 정도의 외교적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점이 반복 강조된 것이다. 그래야 이 어색한 광경을 본 서방의 인사들이 ‘아~ 저런 성과를 거두기 위해 무리를 하였던 것이구나’하고 이해를 할 거라는 게 그간 보수언론이 강조해온 바다.

그러나 이 상황을 단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의 어떤 선택 정도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보수세력이 오매불망 외쳐왔던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측면을 함께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열병식 참가는 명백한 ‘친중행보’로 밖에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후 외교 일정에서 ‘친일행보’(?)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비유를 들어보자면 한쪽으로 막대를 구부렸기 때문에 이제 반대쪽으로 막대를 구부릴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한·중·일 정상회의 이후 한·일 정상회담이 성사될 가능성을 예측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 전승절 기념행사는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이라는 타이틀 아래서 펼쳐졌다.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문제를 놓고 군사적 대치상태까지 간 이력을 갖고 있지만 중국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던 일본이 결국 방중 일정을 잡지 못한 것에는 이 문제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항일전쟁 승리’라는 수사가 붙어있는 상황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열병식에 참석할 경우 외교적으로 곤란한 그림이 그려질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바로 이런 행사에 참석하였다. 때문에 한·중·일 정상회의로 균형을 잡고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푸는 것으로 일정을 기획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결정일 수밖에 없다. 미국이 한국의 전승절 행사 참가를 양해한 것도 다음달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 더해 같은 맥락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 북한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3일 오전 베이징 톈안먼 성루 위에서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열병식 참석으로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더욱 냉랭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눈여겨 볼 포인트다. 북한은 이번 행사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 대신 최룡해 비서를 파견했다. 최룡해 비서는 과거 북한군 총정치국장 직함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면담한 바 있다. 언론은 이런 점에서 최룡해 비서의 역할을 예상하는 분위기지만 다소 부정적인 시각이 힘을 얻고 있는 게 사실이다.

최룡해 비서의 또 다른 직함은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인데 이 직책은 중국과 일본에 대해 민간협력 등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전승절 열병식은 성격상 국가수반에 준하는 인사나 예를 들면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과 같은 군 소속 인사가 참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그림이 그려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최룡해 비서가 성과를 낼 수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러시아와의 경제적·군사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북한이 중국 전승절 행사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물론 김정은 제1비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국제정치적 맥락이 반영된 걸로 보인다.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에게 지난 도발국면에서 역할을 해준 데 대한 감사를 표명한 것에 대해 3일 “남조선 집권자가 엄연한 사실을 날조하면서 해외에 나가서까지 추파를 던지는 것을 보면 말로는 화해와 협력을 운운하지만 진짜 속심은 그 누구에게 기대여 동족대결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며 반발했는데 여기에서도 그간 멀어진 중국과의 관계가 드러난 걸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다만, 북한은 ‘남조선 집권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여전히 관계개선에 대한 의지를 보여 최소한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번 전승절 기념 행사는 적어도 시진핑 주석을 중심으로 한 체제가 흔들리지 않는 한 중국이 구 공산권의 한 축을 자처하는 것을 넘어서서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명백한 ‘맹주’를 지속적으로 자처할 것임을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참석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경제적으로도 중국은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인민은행이 위안화 절하를 단행한 시기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들이 예상 이상의 상당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실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다.

시진핑 주석은 전승절 행사에 장쩌민 전 주석 등 자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인사까지 포함해 원로들을 초청함으로써 국내적 차원에서도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점을 과시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구도에서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과거처럼 복원되는 것은 먼 미래의 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기회를 잘 활용해 남북관계에 있어서 의미있는 진전을 이루는 것이 남은 과제이다. 이번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 뿐만 아니라 이후 한·미 정상회담과 한·중·일 정상회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이를 위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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