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오피스’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제공
인도에는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신분제도, 카스트가 존재한다.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없다고 하지만 수천 년 동안 인도 사회에 뿌리 깊게 내려온 전통이 어디 쉽게 사라지겠는가. 카스트 제도 가운데서 가장 낮은 계급은 ‘불가촉천민’ 달리트라고 한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손에 닿아서도 안 될 만큼 가장 낮은 계급으로, 카스트의 계급 가운데 가장 낮은 계급인 ‘수드라’보다도 못한 계급이 불가촉천민 달리트다. 불가촉천민은 뒤에 빗자루를 달고 다닌다고 한다. 발을 딛고 다닌 발자국조차 불결하다고 해서 자기가 지나간 자리를 뒤에 달린 빗자루로 쓸어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불가촉천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격한 표현이니, 우리 사회에도 카스트의 가장 낮은 계급인 ‘수드라’가 있다고 하면 믿겠는가? 그런데 경제 논리로 따지면 실제로 존재한다. 경제 논리로 보면 고용주 또는 CEO는 카스트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브라만’에 속한다. 사장이나 전무 등의 직급을 ‘크샤트리아’ 귀족이라고 보면, 과장을 위시한 평사원은 ‘바이샤’ 평민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면 ‘수드라’는? 비정규직 계약자들이다. 정규직으로 경제적인 계급이 올라가는 사다리가 크샤트리아 혹은 바이샤의 평가에 달려 있는 이들이야말로, 경제 계급에 있어서는 ‘을’, 웹툰으로 표현하면 ‘미생, 카스트로 표현하면 ’수드라‘ 혹은 불가촉천민이 되는 셈이다.

영화 ‘오피스’는 외적으로는 스릴러 장르를 표방한다. 일가족을 망치로 잔혹하게 살해한 김병국(배성우 분)이 사건 당일에 회사로 들어온 흔적은 있지만 회사 밖으로 나간 동영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병국은 아직도 회사 안에 있으면서 자신을 ‘은따’시킨 회사 동료에게 복수의 칼을 가는 스릴러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오피스’는 ‘김병국의 복수혈전’이 다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경제적인 카스트 제도를 정면으로 직시하는 갑을관계의 음울한 알레고리로 바라볼 만한 영화다. 이미례(고아성 분)는 비정규직으로 김병국의 사무실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한다. 홍지선(류현경 분) 이하 직원들의 잡무와 수발을 도우면서 김상규 부장(김의성 분)의 인사 평가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열심히 하기만 하면 정규직이 될 거 같아 보였는데, 회사는 새로운 인턴(손수현 분) 하나를 더 뽑아서 이미례와 경쟁 구도를 만들어놓는다.

▲ 영화 ‘오피스’ 스틸컷, 리틀빅픽처스 제공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수남(이정현 분)이 성실하게 일할수록 성실의 보상인 경제적인 윤택함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역설 마냥, ‘오피스’의 이미례는 정규직이라는 바이샤 계급을 향해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이미례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들이 여기저기에서 ‘갑툭튀’처럼 툭툭 튀어나온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수남의 좌절 자수가 높아지는 것에 비례해 ‘오피스’의 이미례가 겪는 좌절 지수도 비례해 간다는 건 우리 사회에서 ‘을’이 경제적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만큼 가혹한가를 보여주는 방증이면서, 동시에 여성이 경제적인 주체로서 살아가기에 우리 사회의 진입 장벽이 높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오피스’에서 이미례를 더욱 괴롭히는 건 갑이 아닌 을이 을인 이미례를 을보다 낮은 ‘정’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김상규나 홍지선은 카스트 계급으로 보면 브라만이 아니라 ‘바이샤’ 평민이다. 하지만 김상규나 홍지선, 그 외 다른 사원들은 이미례를 향해 수군거리거나 채근하면서 이미례가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질을 한다. 자신들이 고용주가 아니라 ‘고용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 영화 ‘오피스’ 스틸컷, 리틀빅픽처스 제공
김상규와 홍지선이라는 을이 이미례라는 을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으로 만든다는 건 ‘부속품의 갑질’이다. 김상규와 홍지선이 다른 직원으로 바뀐다고 해서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 게 아니다. 김상규와 홍지선 역시 회사 입장에서는 부속품이다. 회사가 보기에는 부속품에 불과한 홍지선과 그 외 직원들이 이미례에게 갑 행세를 한다는 건 을이 을에게 갑질하는 시추에이션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런 관점으로 ‘오피스’를 보면 을이 을에게 갑질하는 시추에이션, 실은 자신들이 부속품인 줄 모르고 이미례라는 비정규직 부속품에게 갑질하는 ‘부속품이 착각하는 영화’로 볼 수 있다. 자신이 부속품이라는 걸 자각하게 될 때 을은 더 이상 을을 정으로 만드는 착각을 덜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반면교사를 남기면서 말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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