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총학생회가 10년 만에 돌아오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잃어버린 10년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학생운동권들의 구호일지도 모르겠다. 살인적으로 높아지는 등록금 문제에 대해 비운동권총학이 제대로 대응을 못하면서, 그리고 올해 광우병 소고기 촛불집회에서 비운동권학생회가 소극적인 모습들을 보이면서 학생들이 다시 운동권 학생회를 선택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10년 만에 정권을 잡은 운동권학생회가 한나라당처럼 10년 동안 아무 반성없이 지내오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내심 관심을 가져본 김에 어떤 학생들이 선거에 나오고 또 당선이 되었는지 찾아본다.

그런데, 후보들의 약력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었다가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약력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육군만기제대”. 옆 선본의 후보는 더욱 친철하다. “육군병장만기제대(강원도 XX사단)”. 다른 곳들을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의 후보들이 자신의 군경력을 약력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예비역들이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왜 모든 후보의 약력에 “만기제대”가 들어가야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을 뿐이다.

▲ ⓒ고재열
약력은 후보자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가장 간결하게 유권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이 해왔던 수많은 일들 중에 유권자들에게 특히 알리고 싶은 중요한 것들만이 약력에 오를 수 있는 영광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군만기제대가 유권자에게 “나를 꼭 찍어주세요.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핵심 내용이라는 이야기인가? 나는 학생회장을 하는데 육군만기제대의 경험이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끼치는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병장까지 무사히 마쳤다는 것이 밑바닥에서 리더까지 올라와본 경험이 있는 것을 증명한다는 반론이 나오기도 한다. 리더십과 통솔력을 말하려면 차라리 초등학교 때 반장했던 경험을 약력에 넣는 것이 더 좋다. 병장은 군대가서 시간 지나면 누구나 하는 것이지만 반장은 엄연히 투표로(때로는 선생님의 지명, 혹은 아이들에게 뇌물을 돌리는 경우도 있지만) 선출된 리더이지 않은가. 혹자는 학생들이 후보가 약력에 비어있는 2년의 시간동안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 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 변명은 더 궁색하다. 학생회 선거 후보들이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혹은 연예인이라 해도 자신의 모든 연대기를 사람들에게 공개해야 할 필요는 없다. 아주 짧게 표현해야 하는 약력에서라면 좀 더 필요한 이야기들을 넣어야 하지 않을까.

학생회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이 군필의 경력을 자신의 약력에 반드시 넣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부정한 방법으로 군대를 기피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였지만 이회창 후보의 낙선에는 이회창 후보의 아들이 군대를 기피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아마도 그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모든 공직 출마자가 자신의 병역과 관련하여 아무런 비리나 기피의 시도가 없었음을 증명하게 되었던 것 같다. 공직 출마자는 병역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했던 경력이 없어야 함은 당연하다. 온갖 부정비리를 저지른 경제인들이나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선거에서 당선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불행임에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나 가족들의 병역의무를 혹시나 부당한 방식으로 회피하지는 않았는지 검증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선관위원회에 제출하는 문서도 아니고 유권자들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가는 약력에 군필의 경력을 넣는 것은 검증을 훌쩍 넘어선 다른 의미들을 발생시킨다. 여기서 군필의 약력은 군대를 가지 않는 여성이나 장애인, 혹은 군대를 거부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우월한 위치를 선점하는 선전의 문구가 되어버린다. 근대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시민권의 획득이 징병 대상의 확대과정과 맞물려 있었다는 사실은 과거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에도 특히나 한국에서 아주 유효한 지적인 것이다. 김대중 정권 시절 장상 국무총리 서리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군대도 안다녀온 여자가 어떻게 국정을 운영하냐”고 했던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천박한 인식은 사실은 대한민국의 평준적인 시선이었던 것이다. 단지 그 국회의원의 센스가 남들보다 떨어졌을 뿐이다.

학생회선거에 출마한 학생들이 자신을 여성후보로부터, 혹은 군대를 안가거나 못가는 다른 남성후보들로부터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군필 약력을 넣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예전부터 하던 대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가 어떻든 약력의 한 가운데 박혀있는 군필의 경력은 그들이 군대문제에 있어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증명을 넘어서서 군복무의 경험을 바탕으로 군미필자들에 대한 우월한 시민권을 형성하게 된다. 사회의 지배적인 구조는 원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위보다는 구성원들의 무의식적인 행위에 의해 더욱 강력해지는 법이다. 만약 스스로 사회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면 나의 무의식적인 행동까지도 책임을 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혹은 진보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로 군필의 약력을 통해서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회구성원들을 특정한 잣대를 가지고 위계화시키는 것은 올바른 정치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10년 만에 학생회 선거에서 선전하고 있는 운동권 학생들이 학생회선거에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학생운동권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리고 그 문제들은 굉장히 본질적이고 심각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마도 학생운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말의 애정까지 끝내 떨쳐버릴 수는 없는 모양이다. 다만 내년 선거에서는 “병장만기제대”를 약력에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만이 1등 시민이 되는 사회에서는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비이성적인 사회를 지속시키고 있는 사람 중에 내가 포함되지는 않았는지 좀 더 민감한 감수성으로 느껴주면 좋겠다.

애써 찾아가지 않았던 평화가 나에게로 왔다. 평화의 결과로 병역거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병역거부를 하면서 평화를 알아가게 되었다. 현재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착하게 살다가 조용히 죽는 삶을 꿈꾸지만 버리지 못한 욕심이 심장에 붙어있어 떨쳐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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