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구도처럼, 두 개의 관점이 언제나 경합적으로 부딪치는 것처럼 사고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한 쪽에선 정전협정을 위반한 ‘남북 불가침 조약’에 대한 정면 도전이란 성토가 빗발친다. 그 분노는 정당하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쪽에선 ‘노크 귀순’, ‘대기 귀순’에 이어 지뢰를 매설할 동안 우리의 시스템은 대체 무얼 했느냐는 냉소가 쏟아진다. 정부의 발표를 온전히 신뢰하기 어렵단 사람들과 지금이라도 당장 ‘북진’을 준비해야 하는 것 같은 설레발이 기다렸다는 듯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언론은 이 부딪힘을 단순하게 나눈다. 그리고 즐기는 듯도 하다. 단순 분류법은 단조롭다. ‘여당의 주장’과 ‘야당의 주장’이다. 실제 그러하느냐는 별개다. 그낭 두 개의 진영을 설정하곤 선택하면 된단 태도다. 존재가 어디에 가깝냐에 따라서 하나의 사건을 완전히 다른 성질의 무엇으로 설명하는데 아무런 제약을 느끼지 않는 언론 풍토는 거의 상수처럼 굳어졌다. 그 선택을 민첩하게 해버리곤 곧장 상대의 주장을 ‘제압’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야당이 음모론에 기대고 있단 냉소는 ‘이명박근혜 정부’를 관통하는 레토릭이 되어버렸다. 이건 일종의 치부이자, 가장 모욕적인 혐오의 방식이다.

▲ 12일자 조선일보 1면. 북한을 향한 적개와 사고 관련 병사들의 전우애를 버무린 구성이다. 언론이 이번 사건을 소비하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다른 한 쪽에선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말의 성찬’을 벌인다고 비판한다. 현상적으론 맞는 말이지만, 끝없는 악순환 밖에는 탈출구가 없는 논법이다. 당장에 물러날 수 없는 군 책임자들,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야 하는 관계자들 모두가 공범이지만 그렇기에 언제나 주범의 혐의를 피해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허한 것은 대통령께서 그런 비판에 전혀 동요를 느끼는 인격이 아니란 점이다. 군이 북한군 지뢰 매설을 발표하던 날, 평양의 표준시 변경에만 유감을 표한 대통령이다. 이 혼선이 어떤 무능이고,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에 대해 대통령은 늘 그렇듯 최소한의 인식론적 지각도 없어 보인다.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것은 간단한 얘기를 또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합적 관점이 아니라 위계적 관점에서만 문제를 풀 수 있다. 북한군이 DMZ에 목함 지뢰를 묻었다. 우리 군 2명이 치명적 피해를 당했다. 그리고 그 지뢰의 특성상 향후 어떤 사고가 어떻게 또 발생할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현실을 두고 언론은 우선 북한의 책임론을 제기하고, 전우애를 강조하며 상황을 조율하고 있다. 일부 호전적인 언론은 ‘보복’과 ‘응징’의 수단이 필요하단 주장까지 서슴없이 내놓고 있다. 언론의 분위기를 감지한 정부여당은 심리전을 확대한다, ‘삐라’를 날린다는 얘기를 보복의 수단으로 던지고 있다. 묻고 싶다, 그럼 보복이 되는가?

차마 거기까지 가지 않은 매체들은 ‘전우애’를 강조하며 시선을 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정신적 내상을 입었을 사고 관련 병사들이 아낌없이 말하는 ‘인터뷰이’가 되어 언론이 기다리던 그 말을 하는 퍼포먼스에 동원되기까지 했다. 이 장면은 정상적인 사회의 풍경인가, 국방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언론을 위해 그런 ‘플레이’를 하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적의 GP를 깨부수어 버리고 싶다”는 젊은 병사의 외침이 치유의 문제가 아닌 온 국민의 결의로 치환되는 것은 병리적인 증상이 아닐까.

▲ 방송 뉴스에는 여지없이 그래픽을 활용해 상황을 다이나믹한 볼꺼리로 만드는 '그림'이 들어갔다. 11일자 MBC <뉴스데스크> 화면 캡처.

고루한 얘기지만, 엄혹한 얘기기도 하다.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다. 그 체제가 너무 오래 공고화되어 일상적으론 그걸 잊고 살 수 있지만, 사회의 공기 역할을 하는 언론마저 그 구조를 망각하면 곤란하다. 남과 북의 대립은 철책을 두고 맞서는 실제적 현실이고, 지난 4일 폭발한 지뢰는 그 현실이 지금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를 경고하는 문제다. 정부는 극단적으로 무능하다. 시간 순서대로 생각해보면, 북한군의 지뢰가 터진 다음 날 이희호 여사가 방북을 했다. 그 날부터 통일부는 5일간 매일 북한에 고위급 회담을 제안하는 서한을 전달하고자 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5일 철원을 방문해 ‘남북 협력’ 메시지를 남겼다. 국방부는 6일 이미 기자들에게 ‘북한제 목함 지뢰가 폭발한 것 같다’는 사실을 은밀히 알리고, ‘보도 유예’를 요청했다. 일각의 지적에 따르면, 예비군 대령들은 그 사실을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군 당국이 유엔사와 함께 북한군의 무력 도발을 조사하고, 국가안전보장회의까지 열렸음에도 청와대, 통일부, 국방부가 다 따로 국밥이었다. 이쯤 되면 직무유기가 아니라 직무가 뭔지를 망각한 얼치기들의 정부라고 해도 하등 그 표현이 과하지 않다. 분단체제의 위태로움을 소리 나지 않게 억지해가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고, 그 위태로움이 끝내 우리 국민이 피해로 돌아오지 않도록 소문없이 관리하는 것이 또한 정부의 역할이다. 이 정부는 그걸 전혀 못한다. 어떤 언론은 이를 두고 ‘전쟁에 두려움을 갖게 되면,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고도 쓰고 있지만 궤변이다. 전쟁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사회는 체제는 없다. 평화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 아닌 상태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켜진다. 그 두려움이야 말로 모든 현대 정부의 그리고 호전적 언론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세계 유일 분단국가는 더더욱이 정부가 지켜가야 할 몫이다.

▲ 북한이 매설한 지뢰가 터져 우리군 2명이 중상을 입은 다음 날, 박근혜 대통령은 탈북자 자녀들과 경원선을 타고 철원을 방문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평화통일' 메시지를 남겼다. (사진=연합뉴스)

지금, 언론이 따져 물어야 할 단 한 가지는 그 책임을 정부가 다했는가의 여부이다. 나머지는 그게 무엇이라고 해도 부차적이고, 무가치한 일이다. 북한의 책임을 제 아무리 뜨겁게 비판해봐야, 김정은 제1위원장을 ‘통제되지 않는 전쟁광’이라고 힐난해봐야 고작 우리 언론이 그걸 통제할 수 있는 힘은 없다. 백번 양보해 언론이 북한의 도발을 강하게 밀어 붙여 북한의 책임을 공론화한 들, 끝내 그 집행은 북한을 향해 외교적 전술을 구가해야 하는 정부에게 다시 되돌아 올 뿐이다.

그래서, 정부는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은 야당의 주장, 한 쪽 진영의 공세가 아닌 언론이 가져야 할 가장 보편타당한 의문이다. 북한 탓과 정부 무능은 경합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위계가 있는 우선순위 차이가 현격한 문제다. 정부의 무능, 안보의 실패, 거듭되는 경계의 파탄 이유에 대한 의문을 건너뛴다면, 그 어떤 다른 질문을 한 들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걸 개선하기 위해 국방비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고, 북한의 노동집약적 도발에 무고한 우리 국민이 희생되지 않게 대응하고자 군을 선진화하고 장비를 현대화하는 것 아니었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지금 나왔던 얘기들은 짧게는 수년 째, 길게는 수십년 째 되풀이되고 있는 과제들이다. 왜 아무도 이 책임을 묻지 않은 채, 문제를 또 새롭게 하는가. 늘 더 격렬한 상황이어야만 언론의 무능과 무기력이 감춰지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 언론이 곤란하게 만들어야 할 대상은 우리 정부이지 북한이 아니다. 제 아무리 무감하더라도 다시 박근혜 대통령을 때려야 한다. 북한 탓을 아무리 한들 불편해지는 건 그들이 아니다. 우리 정부만 편안해질 따름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