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손가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면 과언일까.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이정현이 연기하는 수남의 남편이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을 때, 아내 수남의 주머니에는 남편의 잘린 손가락이 있었다. 하지만 다친 남편을 병원에 빨리 이송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너무 앞선 나머지, 자기 주머니에 있는 남편의 손가락을 까맣게 잊어버려 결국 남편은 손가락 봉합수술을 받지 못한다.

자신이 병원 측에 손가락을 잘 전달만 해주었어도 남편은 손가락을 잃지 않았을 텐데 하는 수남의 죄책감은 남편에 대한 집착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남편은 손가락 때문에 우울증이 심각해지고, 남편의 우울증이 커지는 것에 비례해서 수남의 응징도 커지기 시작하는 것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속 비극이다. <꽃잎> 이후 20여년 만에 단독 주연을 맡은 이정현이 털어놓는 영화와 가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요즘 같은 무더위는 잠시 잊게 될 것을 확신한다. 그만큼 깊은 속내가 드러난 인터뷰이기 때문이다.

▲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수남 역의 이정현 ⓒ박정환
- 이번 작품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광팬이다. <킬빌>과 <장고>를 너무 좋아한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흡입력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이렇게 전개되겠지’ 했는데 전혀 다른 전개가 이뤄지곤 했다. 한 시간 만에 모두 읽었다. 재미있으면서 잔인한데 화끈하기도 해서, ‘누가 이런 시나리오를 썼지?’ 궁금해졌다.

감독님이 여성적인 관점으로 이렇게 잘 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시나리오를 하도 빨리 읽어서 감독님에게 시나리오를 모두 읽었다고 전화했을 때 감독님이 ‘정말이냐?’고 했을 정도였다. 감독님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영화인데 제겐 너무 행운이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제가 연기하는 수남이라는 캐릭터가 바로 만들어졌다. 관객에게 당위성을 주려면 수남이 한 남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해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납득시켜야 했다. 수남을 맑고 로맨틱하면서도 유아틱한 캐릭터로 설정했다. 수남이 쓰는 손글씨를 보면 유아처럼 직각으로 글씨를 쓴다. 조카가 한글 공부하는 걸 옆에서 보면서 글씨체를 만들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아이 같이 수저를 잡는 식으로 수남이 캐릭터를 잡아갔다.”

- 영화가 요즘 3포, 5포 세대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요즘 사회상을 반영한 영화다. 영화 속 수남은 상고에서 자격증이란 자격증을 모두 땄음에도 3D 업종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한 이유가 출산의 부담도 있지만 내 집 마련에 대한 부담감 아니겠는가. 집을 갖고 있어도 하우스푸어가 되기 쉬운 게 요즘 현실이다.

수남은 밝고 낙천적인 캐릭터라 재미있게 찍어야 했다. 감독님이 참고하라고 <생활의 달인> 테이프를 주었다. 테이프 속 달인을 보니 명함 날리기가 예술이었다. 명함을 던지면 다 들어가서 달인처럼 되기 위해 연습을 많이 했다.”

▲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수남 역의 이정현 ⓒ박정환
- 작년에 출연한 <명량>이 당시 최대 흥행작 <아바타>를 눌렀다. <아바타>의 기록을 <명량>이 넘어섰을 때 어땠는가.

“<아바타>를 넘었다는 기쁨보다는 되게 조심스러웠다. 이순신 장군님은 우리 모두의 전설이다. 전설 같은 분을 영화로 찍어서 관객이 천만 명을 넘었다고 좋아하기보다는 조심스러웠다.”

- <명량>에서 치맛자락을 날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제가 연기한 정씨 여인은 짧은 장면에서 모든 걸 보여주어야 했다. 사실 정씨 여인은 치맛자락을 흔들기 전에 사연이 있었다. 일본 병사들에게 납치되어 성폭행을 거부하다가 혀가 잘려 바다에 던져진 정씨 여인을 임준영(진구)이 구해주어서 살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생명의 은인인 임준영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절절한 심경을 갖고 있는 캐릭터가 정씨 부인이다.

이런 사연이 영화에 나왔다면 연기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정씨 여인의 사연이 있었다면 <명량>에 피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명량>은 이순신 장군님의 영화이지 정씨 부인의 영화가 아니다. 정씨 여인에게 포커스가 맞춰지면 안 되는 영화다. 치맛자락을 흔드는 장면에서 관객의 감동을 끌어내야만 했고, 상황에 집중해야 해서 촬영할 때 힘든 게 사실이었다.

대사라도 있었다면 정씨 여인의 심정을 보다 잘 표현했을 텐데 가슴으로 연기해야 해서 내공을 다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정씨 여인이 수척해보이게 하기 위해 살도 엄청나게 뺐다. 하루에 계란 흰자 두세 개만 먹으면서 촬영했다.”

* 인터뷰 2 에서 이어집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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