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딸과 가난한 의사의 만남. 이 식상하다 못해 질리기까지 한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SBS 수목드라마 <용팔이>는 많은 우려를 딛고 강렬한 첫 인상을 남겼다. 그 중심에는 ‘용팔이’로 불리는 사나이 김태현, 배우 주원이 있었다.

지난 5일 첫 방영한 <용팔이>의 주요 배경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종합병원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의료진이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VIP들에게만 해당되는 혜택이다. 돈도 빽도 없는 사람이 덜컥 이 병원에 입원했다간, 수술은커녕 사채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아직 20대밖에 되지 않은 촉망받는 의사 김태현(주원 분)이 사채의 늪에 빠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김태현은 조폭들을 상대로 왕진을 하며 사채빚을 갚는다. 물론 종합병원 레지던트가 병원 밖에서 수술을 하여 돈을 받는 것은 불법이다.

꼬리가 길면 결국 잡히는 법. 6일 방영분에서 조폭들을 몰래 수술하는 용팔이의 뒤를 캐던 이형사(유승목 분)에 의해 사면초가에 놓인 태현은 이과장(정웅인 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러나 조폭 왕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범죄를 맡게 되었으니, 이렇게 태현은 한신병원 12층 모처에 수면상태로 유폐된 한여진(김태희 분)을 만나게 된다.

한여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재벌 상속녀이다. 재벌가의 권력다툼이라고 하면, 최근 화제가 된 모그룹 후계자들간의 경영권 갈등이 더 재미있게 다가올 정도다. 그러나 <용팔이> 제작진은 별반 새로울 것이 없는 상속녀 캐릭터에 누군가에 의해 억지 코마상태에 빠진 비운의 미녀 이미지를 덧씌운다. 동화 속 잠자는 공주는 마녀의 저주로 깊은 잠에 들게 되었지만, 한여진은 돈과 그룹 회장직에 눈이 먼 오빠 한도준(조현재 분)에 의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용팔이>는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패배해 잠자는 미녀가 된 한여진의 비극적인 운명에 머무르지 않았다. 아무리 한여진의 상황이 딱하다고 한들, 당장의 생계가 걱정되는 서민들에게는 그저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오히려 대다수 시청자들에게 임팩트하게 다가오는 이는 살기위해 무슨 일이라도 다할 수 있는 용팔이 김태현이다.

조폭들 불법 왕진을 다니는가 하면, VIP 환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뒷돈을 챙기는 김태현은 의사로서 직업윤리가 제로에 가깝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온갖 불법 행위는 다하고 다니는 파렴치하고도 양심불량의 인간이 그럼에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미래가 창창한 종합병원 외과 레지던트 3년차가 돈밖에 모르는 괴물이 된 것은 아픈 동생(박혜수 분) 때문에 사채를 쓸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었고, 그 이면에는 엄청난 병원비로 고통 받는 서민 가정의 아픔이 있었다. 최상의 의료 서비스는 언제나 가진 자의 몫이다. 넉넉지 않은 형편의 환자는 아무리 사채를 끌어 쓴다고 한들, 이윤을 남기는 것이 최우선인 병원에서 항상 뒷전일 뿐이요 남는 것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다.

몸소 겪어왔기에, 이 비정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태현은 돈벌레가 되기로 한다. 돈을 위해서 아예 작정하고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나니, 신입 인턴들이 모이는 신고식 자리에서도 스스럼없이 빽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VIP환자 가족에게서 돈을 받는 부정이 발각되어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당당함으로 일관한다.

하지만 <용팔이>는 젊은 의사의 부정을 고발하는 게 전부인 드라마가 아니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는 착한 오빠이자 아들이었던 김태현이 비리 의사가 되기까지의 말 못할 속앓이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그렇다고 김태현이 저지른 모든 불법적인 행동에 면죄부를 주고자함이 아니다. 대신 자신이 저지른 비리를 정당화시키는 김태현을 통해 온갖 불법행위들이 만연한 종합병원의 현실을 더욱 부각시킨다.

돈과 빽이면 만사형통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자본주의 노예를 자청한 남자와 그 남자를 타락시킨 천민자본주의의 일그러진 초상. 재벌 상속녀와 개천에서 난 용한 의사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만 흘려가기엔 아까운 임팩트 있는 이야기가 <용팔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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