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 혁신위원회가 지난 달 26일 발표한 5차 혁신안이 야당을 넘어서서 이제 여의도 정가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과 함께 ‘의원정수 369명으로 확대’를 제안한 선거제도 개혁안 때문이다.

혁신위는 지난 2월 중앙선관위가 정치권에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과 함께 제시한 지역구 대 비례대표 의원 비율 2 대 1을 차용하고, 현재 지역구 의원 246명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이에 대응하는 비례의원을 123명으로 증원하자고 예시하는 바람에 격렬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국민여론을 업은 새누리당은 즉각 ‘의원정수’ 확대 반대에 나섰고 문재인 대표는 황급히 진화에 나섰다. 7월 28~30일 사이 한국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현재 300명 국회의원 정수는 ‘적당하다’ 27%, ‘늘려도 된다’ 7%, ‘줄여야 한다’가 무려 57%였다. 국회 정치개혁특위 새정치연합 간사인 김태년 의원도 부랴부랴 "여당이 지역구를 줄이는데도 부정적이라면 현행 지역구 숫자는 유지하고, 비례대표 54명에 대해서만 권역별 비례로 전환하는 것을 검토하자"며 한 발 물러섰다.

▲ 새정치 혁신위원회 김상곤 위원장이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 관련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버렸지만 문재인 대표는 지난달 31일 “우리 정치에서 무엇보다 절실한 개혁 과제가 망국적인 지역주의 정치구도 타파”라면서 의원정수 유지 속 권역별 비례제 실시를 재차 촉구했다. 그런데 야당이 국민과 여당의 반발을 살 의원정수 확대까지 예시하면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제안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당초 새정치연합이 중립적인 국가기관인 중앙선관위가 제안한 지역구 200명, 권역별 비례대표 100명 안을 들고 나왔다면 여당도 이를 외면하기는 옹색했을 터이다.

야당이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제 1의 명분으로 내거는 것은 지역주의 타파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선거제도 중 지역주의를 가장 완화시킬 수 있는 건 전면적인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도입이다. 그러나 이는 비현실적이므로 중대선거구제가 그나마 가능한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4월 국회 연설에서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을 역설했으며, 여의치 않을 경우 소선거구제와 결합한 권역별 비례제 도입을 당부했다. 실제로 중선거구제였던 9~10대 유신국회를 보면 영호남에서 지역 쏠림은 없었다. 이때는 2인 선거구로 여야가 동반 당선되므로 영남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47석, 야당인 신민당이 37석을 획득해 공화당 독주는 없었다. 호남에서도 공화당 28석, 신민당 21석으로 팽팽했다. 이어진 5공화국 때도 2인 선거구제가 유지됐는데 역시 영호남 지역주의 투표는 없었다. 1985년 12대 총선 결과를 보면 여당인 민정당이 영남에서 25석, 호남에서 18석을 획득했다. 이에 반해 야당은 영남에서 신민당이 17석, 민한당 10석 등 합계 27석으로 오히려 여당보다 많았다. 호남에서는 신민당 7석, 민한당 6석 등 합계 13석으로 여당에게 뒤졌다.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정치권에서 본격 논의가 시작된 건 16대 총선을 앞두고였다. IMF를 거친 당시 여당인 국민회의는 의원정수를 250명 선으로 줄이되,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1 대 1로 하는 혁명적인 당론을 채택하였다. 소선거구와 6개 권역별로 비례의원을 선출하는 일본식이었다. 이후 공동여당의 협상안은 7대 도시에 한해 중선거구(2~4인 선출)를 하는 도봉복합선거구와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바뀌는데, 당 지지율이 미약한 자민련을 위한 정략이었다. 3당 3역(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의장) 회담을 통해 한나라당이 전국적인 소선거구와 권역별 비례제 및 정당명부식 투표 등을 역 제안했으나 자민련의 거부로 최종 결렬됐다. 이 당시 김무성 대표는 1999년 1월 한나라당 원내부총무를 사임했지만 이러한 협상 전개과정을 모를 리가 없다. 서청원 최고위원은 1998년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역임한 중진이었기 때문에 권역별 비례제 논의내용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17대 총선을 앞두고도 선거제도 개편논의는 뜨거웠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정기국회 회기 막판, 전체 의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지역구도 혁파를 위한 중대선거구제 또는 도농복합선거구제 논의를 요청했다. 노 대통령은 “중대선거구제는 2~5인이 최선이며, 농촌은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는 도농복합선거구제도 합리적 방안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만약 소선거구제를 해야 한다면 최소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분당으로 소수가 된 여당은 이를 추진할 힘이 없었고, 거대 야당은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을 의사가 없었다. 따라서 2001년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에 따른 기존 전국구 제도가 1인 2표제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비례대표제는 ‘1인 1표주의’라는 국민의 의사를 가장 정확하게 의석으로 반영하고자 고안해낸 선거제도이다. 19세 후반 벨기에의 법학자 빅토르 동트가 소선거구제와 같은 단순 다수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처음 제안한 바 있다. 소선거구제 같은 1위 다수 대표제의 경우는 각 선거구별로 사표가 대량으로 발생하는 문제점을 야기한다. 그러나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정당의 득표율에 비례해 당선자의 수를 결정함으로써 득표율이 곧 의석 비율과 일치시킨다. 보통은 3~5% 봉쇄 조항을 두지만 그래도 소수파의 의회 진출이 용이하므로 다당제를 유도하는 선거제도이다. 서유럽에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는 대부분의 나라가 주요 정당이 7~8개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비례대표제의 가장 큰 장점은 표의 등가성 확보이며, 지역주의 극복은 부수적으로 얻는 덤일 뿐이다. 그래서 지역주의 타파를 전면에 내세운 새정치연합은 본말전도인 셈이다. 19대 총선 결과를 살펴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지역구 투표에서 새누리당은 43.3% 득표율로 의석의 51.6%인 127석을 얻었다. 민주통합당 역시 37.9%의 득표율로 43.1%인 106석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 통합진보당은 6.0%의 득표율을 올리고도 의석의 2.8%인 7석을 얻는데 그쳤다. 영호남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양당의 횡포가 득표율과 의석 비율의 불일치로 나타난 것이다. 19대 총선 결과를 중앙선관위 제안대로 지역구 2 대 비례대표 1로 하여 다시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은 각각 15석과 10석이 줄어든다. 통합진보당은 무려 18석이 늘어나 당당한 원내교섭단체의 지위를 차지하며 국회 운영에 참여하게 된다. 제 3당의 존재는 중재자 없이 대결로만 일삼아온 우리 국회에 신선한 청량제로 작용할 수도 있을 터이다.

▲ 야당의 정치 혁신안은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의원 정수'가 먼저 부각되면서 그 취지와 의미가 많이 퇴색 되어버린 상황이다. (사진=연합뉴스)

진보학자들과 야당이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고 있는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사실 직능이나 계층 대표제가 아니다. 소수자 또는 전문가 발탁용은 더 더욱 아니다. 독일은 연방 하원의원선거법에 따라 주별(권역별) 비례의원후보 명부도 철저하게 민주적으로 작성된다. 지방당에서 활동해온 피선거권을 가진 자들이 당원총회 또는 대의원회의를 통해 선출된다. 즉, 독일의 주별 비례의원은 말이 비례대표이지 사실은 지역구의원과 크게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지역주의 타파를 주장하는 야당의 사정은 과연 어떨까? 권역별 비례제 도입은 무산됐지만, 1998년 국민회의가 이를 당론으로 채택한 후 새정치계열 정당이 취약지역 영남지역에 비례의원을 어느 정도 배려해왔는지 확인해 보자. 16대 새천년민주당은 19명의 전국구를 당선시켰다. 이 당은 동진정책을 쓴다며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런데 영남에서 활동한 원외위원장은 단 1명도 없고 김영진, 윤철상, 최재승 등 호남의 현역 지역구의원들을 전국구로 이동 배치한다. 17대 열린우리당은 23명의 비례대표 당선으로 최대 의석을 차지했지만, 영남권에서 활동해온 저명한 당원은 새천년민주당 부산시지부장 출신 윤원호 의원이 유일하다. 또한 분당으로 잔류한 새천년민주당은 4명의 비례대표를 확보하는데, 호남지역구 출신 김홍일 의원을 포함시킨다. 18대 통합민주당은 15명의 비례대표를 당선시키는데, 호남지역구 김충조 의원을 비례로 이동시켰을 뿐 영남지역 당원활동가는 없었다. 19대 민주통합당엔 21명의 비례대표가 안착하였다. 그러나 경북도지사 출마 등으로 고생해온 홍의락 의원이 유일한 영남권 비례대표일 뿐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16대부터 19대까지 새정치계열 정당은 총 82명의 비례대표를 배출했다. 그런데 이 중 이미 지역구에서 과다 대표하고 있는 호남 현역을 5명이나 이동 배치했으나, 영남권에서 고생고생하며 활동해온 원외인사에 대한 배려는 고작 윤원호(17대), 홍의락(19대) 의원 단 2명뿐이다. 물론 절대적인 비례대표 의석수가 적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결코 핑계에 불과하다. 특히 지난 17대 이후 매 총선 때마다 적지 않은 득표율을 올리면서도 이에 상응한 지역구 의원 배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영남권에 적절한 비례의원을 할당하지 않은 새정치계열 정당은 혹독하게 비판받아 마땅하다. 참고로 정당투표 득표율이 17대는 30.2%(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합계), 18대 8.8%, 19대는 23.1%이다. 지난 2.8 전당대회에서 새정치연합은 노동부문과 청년부문에 대하여 각각 2명씩의 비례대표 할당을 명문화한 바 있다.

새정치연합이 정말 권역별 비례대표제 확대를 통한 지역주의 극복을 이 시대 정치개혁의 주된 과제라고 여긴다면, 지금까지 영남권 비례대표 배정에 대한 인색함을 먼저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이 우선이다. 야당 안에서도 지금의 비례대표 의석만을 가지고서라도 권역별 비례제를 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니 여당에게 법제화를 요구하기 전에 야당 스스로 당헌을 개정하여 가능한 범위에서라도 권역별 비례제를 실천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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