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의 전달과 해석을 비판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언론에는 '전달'과 '해석'은 있지만 비판이 실종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인은 '남의 말'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차도살인'을 일삼는 비겁한 존재로나 묘사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비판은 실종된다. 제대로 된 비판을 위해 가끔은 언론이 직접 자신의 의견을 공격적으로 드러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래도 진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를 우리의 말로 표현하고자 한다.

‘개혁’이 화두다. 여야가 선거제도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혁신위원회가 권역별 비례대표제의 도입과 의원정수 확대를 주장한 것에 대해 여당이 연일 쟁점의 확대를 기도하고 있다. 국회의원직을 늘리는 것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활용하겠다는 심산이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의 주장에 대해서는 야권 지지자들끼리도 논쟁이 거세다. 혁신위원회가 일종의 ‘정치적 월권’을 행사한 것이란 지적도 있고 혁신안 자체의 당위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있다.

사실 제도에는 ‘정답’이 없다. 대다수의 학자 및 전문가들이 의원 정수 확대의 필요성을 말한다. 법과 제도의 취지와 정합성을 고려한다면 그렇다. 헌법재판소는 이미 선거구의 인구편차를 2대 1로 맞춰야 한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린 바 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의 비율을 2대 1로 맞춰야 한다는 권고를 한 바 있다. 이들의 이런 판단은 특정 정치세력의 유불리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 현행 법령의 취지와 맥락을 고려한 해석과 제안이다.

그런데 정치제도를 알맞게 변경하는 것으로 ‘좋은 정치’라는 결과가 반드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이 권하고 있는 선거제도의 개선은 의회정치가 어떻게 국민들의 의사를 더 잘 반영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이를테면 완전한 직접민주주의가 오히려 나쁜 정치를 만들어낼 가능성도 있고 오히려 독재에 가까운 체제가 좋은 정치를 만들어낼 가능성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우정치를 염려한 맥락을 다시 되돌아보면 이런 딜레마가 드러난다. 제도에 정답이 없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독재를 옹호하자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제도의 문제를 바라보는 대중의 냉소적 시선을 극복할 정치인들의 자기인식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일부 국민들이 국회의원 정수 확대를 반대하는 이유는 정치인들을 ‘정당하지 않은 기득권’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겉으로는 명분을 외치면서 거짓말을 일삼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는 게 대다수 국민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다. 이런 자리를 더 늘리자는 것은 결국 부당한 기득권을 확대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런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헌법재판소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시하고 있는 당위와 명분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권역별 비례대표제의 경우 현재까지 정치권과 언론의 주요 관심은 ‘누구에게 유리한 제도인가’에 맞춰져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과반 의석을 잃을 수 있다는 새누리당의 내부 문건이 드러나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선거 제도 개혁 논의가 각 정치세력에 대한 유불리의 문제로만 다뤄지면 대중의 냉소주의를 부추길 위험이 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하는 명분을 보는 게 아니라 “자기들한테 유리하니까 제도 개혁을 주장한다”는 여론 형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 27일 국회에서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공직선거법심사소위가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치권의 영원한 논란거리인 개헌 문제도 마찬가지다. 최근 정의화 국회의장 등은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 문제에 대해 원칙적인 찬성 입장을 밝히면서 개헌을 언급해왔다. 선거제도와 권력구조의 변경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정치세력별·지역별 유불리의 문제로 비춰지면서 진지한 논의가 어렵게 됐다. 구도를 대권주자 중심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개헌 논의는 차기 유력 대권주자의 지지기반을 허물기 위한 현 정치세력의 합종연횡이다. 이명박 정부 시기 박근혜 대통령의 탄생이 분명하던 때에 친이계 의원들이 ‘분권형 대통령제’ 등을 주장한 게 대표적이다. 4년중임제 등과 관련된 논의도 차기 대통령의 권력을 어떻게 구성하고 견제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구도를 지역에 초점을 맞춰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 개헌논의는 특정 지역에 있어서의 유불리 문제다. 이를테면 충청권 출신 정치인들이 ‘강소국 연방제’ 등의 주장을 내놓고 있는 것은 영호남을 중심으로 한 지역정치가 고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충청권의 ‘캐스팅 보트’를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가의 문제로 비춰진다. 논의가 이렇게 흘러가니 최근에는 충청, 호남, 대구경북,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이 각각 존재했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로 해석 가능한 주장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비박-비노 연대’와 같은 합종연횡의 모델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여러 형태로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의 명분은 사표방지와 지역주의 극복, 다당제 구도의 유도이지만 주요 양당의 ‘비주류’들이 현재의 권력구도에서 탈출(?)하자고 주장하는 것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모든 요소들이 정치적 냉소의 먹잇감이다. 냉소주의는 거의 언제나 보수적 결론으로 치닫는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구도를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거부하게 된다는 말이다. 현대의 정치적 냉소는 ‘속고 싶지 않다’는 소비자적 욕망의 표현이다. 급격한 변화를 추진하는 세력은 자신들의 진정한 의도를 숨기며 그럴듯한 명분으로 대중을 속이려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불량한 상품을 과대광고와 온갖 마케팅 전술을 활용해 포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속지 않도록 그들이 주장하는 변화를 거부해야 한다. 이것이 보수주의와 결탁한 정치적 냉소의 주요 논리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책임감 있는 정치세력이라면 제도 개혁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대중의 정치적 냉소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또한 찾아야 한다. 그래야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의 변화를 꾸준히 추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냉소를 극복하는 주요한 방법 중 하나는 대중을 실제로 정치의 현장에 참여하도록 하고 그러한 과정 자체가 민주적 의사결정구조에 대한 학습과 훈련이 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대중을 ‘정치 소비자’의 처지에서 직접 정치를 생산하고 이를 책임지는 주체로 변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치와 관련한 제도개선의 문제는 더 많은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해야 한다거나 특정 정치세력의 성장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차원보다는 국민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주체화시킬 것인가의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단지 이상을 외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정치의 이중성을 말하기 위해 ‘백조’의 예를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백조가 물에 우아하게 떠있는 것 같지만 실제 수면 아래서는 부산하게 다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인들이 명분과 이상을 내세우지만 결국 필요한 것은 현실의 이익과 타협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비유다. 그러나 지금은 이 비유의 원래 의미를 되찾아야 할 때다. 결국 백조가 수면 아래서 발을 움직이는 것은 우아하게 물 위에 떠있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정치인의 ‘우아함’이란 결국 “왜 정치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직결된다. 이 질문에 성실히 답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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