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해킹 의혹 사건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오픈넷 등과 백신프로그램을 발표하는데 함께하는가 하면 새롭게 제기된 의혹들도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정부여당 및 보수언론은 여전히 ‘안보’ 문제를 강조하며 ‘물타기’에 나서고 있다.

한겨레는 이날 1면에 배치된 <“국정원 불법, 안보라는 말로 감추지 마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국가정보원 해킹 의혹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요구에 대해 새누리당과 보수언론 등이 ‘안보자해행위’(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라는 논리를 펴며 ‘물타기’를 본격화하고 있다”면서 “‘적을 코 앞에 두고 국정원을 무장해제 시키자는 것이냐’는 식의 ‘안보론’을 내세워 불법 논란을 뭉개고 가겠다는 것인데, 법률 전문가들은 ‘첩보활동을 하지 말란 게 아니라 법 테두리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입을 모은다”고 전했다.

▲ 한겨레 31일자 1면 기사

통신비밀보호법은 통신의 일방이나 쌍방 당사자가 외국인일 경우에도 대통령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는데 국정원은 해킹프로그램인 RCS사용과 관련해 승인을 받지 않았다고 밝혀 불법 논란을 자초했고, RCS를 사용해 스마트폰의 모든 정보를 빼낼 수 있다는 점에서 해킹 자체만으로 불법성이 농후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것이다. 한겨레는 이어지는 4면에서 ‘불신’, ‘무능’, ‘불법’이라는 3대 키워드로 국정원을 둘러싼 의혹을 재정리하기도 했다. 국정원이 대선 개입 논란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에서의 증거 조작 등의 의혹으로 불신을 자초했고 이탈리아 업체에 중요한 안보정보를 노출하는 등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 경향신문 31일자 4면 기사

여권이 이 문제에 대한 ‘물타기’에 나서고 있다는 지적은 경향신문의 지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경향신문은 이날 4면 김진우 정치부장 명의의 ‘기자메모’에서 여당이 국정원 해킹 활동이 공개되면 대북·대테러 사이버 활동 등 정보역량에 구멍이 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지난 29일 국정원이 해킹 프로그램으로 200여차례 대북정보활동 등을 위한 해킹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북한 불법 무기거래를 적발한 사실이 ‘여권 관계자 발’로 알려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회의에서 국정원이 철저히 비공개를 요청할 만큼 민감한 내용임에도 해킹 활동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이를 공개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김진우 기자는 여권의 이러한 행태를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는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비공개를 고집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국가기밀을 서슴없이 공개하는 것”이라고 평하면서 “‘안보는 보수’라고 주장한다. 보수의 안보라는 게 ‘그때 그때 달라요’ 수준을 넘지 않는다면 과연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 조선일보 31일자 사설

‘여권 관계자’의 어이없는 행위는 보수언론 역시 비판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날 <사찰 의혹 벗으려 기밀 공개한 與·국정원 제정신 아니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북한의 무기 거래를 비롯해 국정원이 밝힌 ‘해킹 성과’는 모두 외교·안보적으로 민감한 기밀사항”이라면서 “세계 최강 정보기관들이 스스로 해킹을 했네 안 했네 시시콜콜 까발리고 떠들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국정원이 아무리 야당의 공세가 억울했더라도 일의 경중을 분간하지 못한 채 아마추어처럼 행동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국정원이 ‘직원 일동’으로 성명을 낸 것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파문 당시 국정원 대변인이 야당을 공격한 것 등을 예로 들며 “모두 ‘정보기관은 입이 없어야 한다’는 철칙을 무색하게 만드는 행동이다. 이러니 국정원이 지난 2년여 동안 세 차례나 검찰 수사를 받는 수모를 당하고도 국민의 믿음을 온전히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 조선일보는 27일 국회 정보위 회의 당시 이 문제를 기밀로 판단해 공개하지 않기로 했는데도 29일 여당 관계자가 언론에 흘렸다는 점을 지적하며 “국회나 여당이 당장 발설자를 가려내 국회 절차에 따라 징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검찰이 수사를 통해 국가 기밀 누설 경위를 조사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조선일보가 이렇게까지 국정원을 비판하고 나서는 것은 의혹 제기 이후 국정원의 행보가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해킹 논란이 불거진 직후 국회 정보위에 판단해 관련 자료의 공개 등을 암시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이병호 국정원장의 이러한 발언이 해킹 프로그램 운용 등을 담당하던 임모씨를 압박한 하나의 수단이 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국정원의 대응이 논란에 휩싸이는 상황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새로운 의혹까지 제기돼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JTBC <뉴스9>는 30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정원 직원 임모씨가 사망 당시 타고 있던 마티즈가 사건 다음날 한 타이어 업체에 의해 폐차 의뢰됐는데, 이 업체가 평소 국정원과 거래를 하던 업체라는 것이다. 임모씨의 사인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 국정원과 관련이 있는 업체가 사건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주요 증거품에 대해 시급히 폐차를 요청한 것이므로 논란이 확대될 수밖에 없다. 이 마티즈 차량은 임모씨가 지난 2일 중고차 거래 사이트를 통해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결국 구입부터 폐차까지 3주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시 의심스럽다는 게 JTBC 보도의 핵심이다.

이러한 의혹 제기는 국정원 해킹 의혹과 관련 야당이 물러설 수 없는 정치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전병헌 최고위원은 31일 최고위원회에 출석해 “임모씨가 타고 있던 마티즈는 사망 다음날 폐차됐고, 폐차한 주체는 가족이 아니라 국정원이었다는 충격적인 언론 보도가 있었다”면서 “임 과장의 죽음과 발견, 사후 대응 모두 국정원의 냄새가 풍긴다”고 주장했다. 전병헌 최고위원은 “국정원의 첫 해명은 임 과장이 일개 기술자라는 것이었지만 며칠사이 그는 최고의 마이더스 손으로 돌변했다”면서 “국정원이 윗선을 숨기기 위해 모든 행위를 죽은자에 전가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 한국일보 31일자 사설

국정원 해킹 의혹과 관련해서는 새정치민주연합이 검찰에 고발을 해놓은 상태다.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이 불가피하지만 실제로 철저한 수사가 진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국일보는 이날 <국정원 근무검사의 해킹 수사 믿을 수 있겠나>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여야가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기술 간담회를 국정원에서 열기로 했지만 결과물이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여 검찰수사만이 진실을 규명할 수 있게 됐지만 미덥지 않다고 썼다. 한국일보는 “수사를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와 공안2부 부부장검사의 국정원 파견 근무 경력은 검찰이 미리 한계를 그어 놓고 수사를 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면서 “더구나 공안부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 당시 국정원이 조작한 증거를 그대로 법원에 제출해 물의를 빚은 전력이 있는데다 평소 업무 성격상 국정원과 동업자 의식을 공유한다고 알려진 부서다”라고 지적했다.

결국 국정원, 검찰, 여당이 합심해 이 사건 의혹을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의심이 대중적 차원에서 확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언론은 이날 지면에 국정원과 관련된 기사나 사설을 거의 배치하지 않아 ‘침묵의 동조’를 함께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국정원 해킹 의혹이 제기된 이후 보수언론은 별 영양가도 없는 “해명하라”는 취지의 사설을 배치하거나, 어쩔 수 없이 끌려가듯 사실관계에 대한 건조한 기사를 쓰거나, 의혹을 제기하는 야권에 핀잔을 주거나, 그도 아니면 침묵을 지키는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보수언론이 무엇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지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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