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침묵이 길어지고 있다. 주요 현안에 대해 한 마디도 내놓지 않고 있다. 여기서 주요 현안이란 ‘메르스 종식’ 이후와 ‘국정원 해킹 의혹’이다. 국회법 개정안 관련 정국에서는 ‘배신의 정치’를 언급하며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말 그대로 찍어내버리는 위력을 발휘했으면서도 정작 국민의 불안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 사안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하는 대통령에 대해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서 박근혜 대통령이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이유는 ‘종식’이 선언됐지만 누가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 불명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28일 황교안 국무총리는 제1차 ‘국민안전 민관합동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격리자가 모두 해제되는 등 여러 상황을 종합해볼 때 국민께서 이제는 안심해도 좋다는 것이 의료계와 정부의 판단”이라며 사실상 메르스 종식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 등 관계부처도 메르스 상황에 대한 ‘출구전략’에 돌입한 상태다.

이쯤되면 주무부처 장관을 어떻게 하겠다거나 하는 구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의 내용이 제각각이라 이후를 정확하게 전망하는 건 사실상 어렵다. 일각에서는 ‘문형표 장관 유임론’이 나온다. 지난 17일 박근혜 대통령이 문형표 장관으로부터 메르스 후속대책을 보고 받으면서 “마무리 잘하고 나머지도 챙겨달라”고 당부했다는 게 근거다. 문형표 장관이 비서관을 새로 임명한 것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실어주는 근거다. 경질될 장관이 인사에 적극적으로 나설리는 없기 때문이다.

야권은 이에 반발하고 있다. 지난 29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최고위원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초기 대응 실패에 철저한 진상조사를 해 다시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보건당국을 비롯한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자리에서 오영식 최고위원은 “책임질 사람에 대해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서 “ 박 대통령이 이제라도 국민에게 진정성있는 사과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추미애 최고위원 역시 “메르스에 대한 총괄적 무능을 드러낸 문형표 장관의 해임과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를 촉구한다”며 “정부·여당은 아직 메르스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청와대에서 열린 광주 유니버시아드 대회 선수 및 관계자 초청 오찬에서 윤장현 광주시장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청와대는 여전히 어정쩡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30일 6면에 <메르스 ‘문책 인사’ 8월 말로 늦춰질 듯>이란 제목의 기사를 배치했다. 여기서 청와대는 메르스에 대한 ‘의학적 종식 선언’이 나오는 8월 말로 문책인사가 늦춰질 것이라면서 “지금 문 장관 교체 준비를 진행하는 것은 일 시켜 놓고 그 사람을 흔드는 격”, “그래서 적절치 않다는 게 대통령의 생각인 것 같다”는 등의 발언을 내놓고 있다. 의학적으로 종식 선언이 되면 문책 인사와 함께 대통령의 유감 표명도 있을 수 있다는 발언도 곁들여졌다.

그러나 국민을 안심시키고 위로할 수 있는 입장의 표명을 과연 아낄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입장의 표명이라는 건 필요하다면 매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문형표 장관의 교체는 메르스 사태의 초기 대처가 문제였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상황을 볼 때 불가피한 일이다. 어차피 불가피한 일이라면 메르스 사태의 마무리를 문형표 장관에게 시키더라도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신호를 줄 필요가 있다.

꼭 문형표 장관의 해임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입장을 대통령이 밝히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중앙일보는 이날 1면에 국회가 보건복지부에서 보건·의료·방역 부문을 따로 떼어내 보건부를 신설하도록 정부에 권고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국회 중동호흡기증후군 대책특별위원회가 보건부 신설 또는 질병관리본부의 질병관리청 격상, 보건복지부 내 보건담당 차관을 두는 복수차관제 도입 등을 포함하는 보고서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이날 사설에서도 “연금전문가인 문형표 장관과 복지전문가인 장옥주 차관이 전염병을 막는 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길 기대한다는 게 애초부터 무리였는지 모른다”면서 역대 보건복지부 장관 중 보건에 전문성을 가진 인사가 없어 공무원들도 복지분야를 선호해 보건의료 분야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건복지부에서 보건의료 영역을 따로 분리시키는 게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보건부를 분리 신설하는 것은 정부조직법을 개정해야 하는 문제다. 이 과정은 야당과의 또다른 정치적 협상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이 이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러한 과정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후속조치에 대한 한 마디 언급도 없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구체적으로 국회가 제안을 내놓는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국회가 제안을 하거나 말거나 대통령이 침묵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 해킹 의혹에 대해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이 문제는 국정원이 의혹을 쉽게 풀 수 있을만한 해명을 내놓지 않으면서 장기화되고 있다. 국정원이 근거도 없이 오직 ‘믿으라’고만 한다며 국회 정보위원회를 교회에 비유한 국회의원이 나올 정도였다. 이 와중에 야당은 해킹프로그램을 구입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국정원 해킹 의혹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에 배당됐는데 한국일보는 이 부서의 담당 검사들이 국정원으로 파견근무를 다녀온 경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객관성 논란이 예상된다고 전하고 있다.

국정원의 대응이 심상찮아 보인다는 것도 논란을 키우고 있다. 의혹이 제기된 직후 이병호 국정원장은 적극적으로 의혹을 해명하겠다면서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거나 직을 걸겠다는 등의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이러한 입장표명 자체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만 해킹 프로그램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는 국정원 직원 임모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 ‘직원 일동’ 명의의 입장이 제출되는 등의 사태는 국정원 내부의 체계가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의심케 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해킹 의혹 자체보다도 해킹 의혹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이병호 국정원장의 거취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런 때에는 대통령이 어떤 방식으로든 입장 표명을 해야 한다. 민간인 사찰이 없었다는 점을 국정원이 성실히 해명해야 한다던지, 그래도 국정원의 사이버전 능력을 축소시키는 결과가 되면 안된다던지, 검찰이 국정원을 철저히 수사하라던지, 이병호 국정원장을 변함없이 신뢰한다던지, 중단없는 국정원 개혁을 지속하겠다던지 등의 입장 표명이 있어야 검찰과 국정원이 상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은 아직도 구중궁궐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병기 비서실장 임명 이후 소통을 강화하겠다며 만든 ‘티타임’도 이벤트에 그쳤다. 소통을 하겠다던 이병기 비서실장에 대해서는 ‘왕따설’이 떠돈다.

대통령이 외면한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개혁을 중심으로 4대개혁에 집중하고 싶다는 의도일 수 있겠지만 메르스 후속조치든 국정원 의혹이든 빨리 해결하고 넘어가야 이후 과제를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상황이 다 지나고 나서 다른 사람들을 채근하는 게 전부다. 이런 방식으로 남은 임기를 흘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라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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