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의 해킹 의혹 대응이 ‘정해진 수순’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27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민간인 불법 사찰이 없었다고 해명하면서 담당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태에서 사실상 진실의 규명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내놨다. 그러면서 이병호 국정원장은 자살한 국정원 직원 임모씨가 삭제한 51건의 자료 중 대북·대테러용이 10건,‘잘 안 된 게’(해킹에 실패한 사례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10건, 국내 실험용이 31건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또, 그간 이탈리아 해킹팀 측과 RCS(Remote Control System) 구매 및 해킹용 피싱사이트 개발 의뢰 실무를 진행해온 것으로 의혹을 받아 온 ‘devilangel1004’가 자살한 임모씨라는 설명도 나왔다. 이에 대한 근거자료는 제시되지 않았다.

▲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이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전체회의를 마친 뒤 국회를 떠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개인적 일탈'이란 '정해진 수순'으로 흐르는 국정원 해킹 의혹

결국 국정원이 지난 대선 개입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핵심 의혹에 대해서는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며 ‘개인적 일탈’ 정도의 사안으로 문제를 덮고 가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광진 의원이 “지금 정보위원회장이 교회입니다. ‘근거는 없지만 믿어달라’고만 하네요. 아멘”이라고 비꼰 것은 이런 맥락을 강조하려고 한 것으로 읽힌다.

새누리당 관계자 등에 의하면 국정원은 임모씨가 삭제한 자료들을 복구하는데 일주일의 시간이 걸린 것에 대해서도 데이터의 저장 형태외 취급 방식이 특수했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28일 MBC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은 내용이 방대하고 일부 백업이 안 된 내용이 있어 시간이 걸린 것으로 설명됐다고 전했다. 27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한 새누리당 박민식 의원은 “RCS 시스템 자체가 일반 PC가 아닐 뿐만 아니라 몽고DB 등 일반적인 DB가 아니라고 한다”면서 “시스템 포렌식 분석을 하려고 하면 지금 있는 RCS시스템과 동일한 하드웨어 시스템을 갖춰야 하고 시스템 갖췄다 하더라도 삭제된 데이터를 복구한 이후 내국인 사찰과 관련됐는지 여부를 분석해야 한다. 그래서 일주일도 빠듯했다는 설명이다”라고 전했다.

새누리당 관계자들의 이런 반응을 보면 국정원의 설명이 불성실했던 것에 더해 IT지식이 부족한 국회 정보위원들의 한계가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설명에 의하면 RCS와 관련된 자료들은 몽고DB로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몽고DB란 어떤 특별한 장치라기 보다도 ‘No SQL’로 지칭되는 종류의 비관계형 데이터베이스(DB) 관리프로그램의 이름이다. No SQL로 분류되는 계열의 DB 프로그램들은 주로 ‘빅데이터’를 다루는 데 쓰인다. 기존의 관계형 DB관리프로그램과 비교하면 일관성(consistency)이나 가용성(availability)중 하나를 포기해 정합성이나 무결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진실을 밝히는데 장애가 되는 국회 정보위원들의 한계

몽고DB 체계에서 특정 데이터를 삭제하는 것은 윈도우즈 시스템에서 ‘딜리트 키’를 눌러서 삭제하는 것과는 다른 절차를 거칠 수밖에 없다. ‘insert, find, update, delete’ 등의 명령어를 직접 입력하거나 RCS에 탑재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터페이스를 이용해야 한다. 따라서 애초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이 “딜리트 키를 누르는 방식으로 자료를 지웠다”고 설명한 것은 오해를 부를 수 있거나 최소한 충분치 않은 설명이다. 이철우 의원이 언급한 ‘딜리트 키’가 DB에 직접 접속해 delete 등의 명령어를 입력했다는 것을 뜻하거나 RCS에 탑재됐을 인터페이스에서 특정 조작을 시행했다는 의미라면 온전치는 않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는 설명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정원 직원 임모씨가 데이터를 완전히 삭제하는 기술을 의미하는 ‘디가우징’이나 ‘이레이징’을 시행하는 게 불가능했을 정황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디가우징은 하드디스크에 물리적 영향을 줘 데이터 전체를 파괴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려면 RCS가 설치된 하드디스크 자체를 파괴해야 하므로 시행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레이징은 하드디스크에서 일반적인 삭제가 이뤄질 경우 파일의 위치 정보만 삭제되고 데이터의 내용은 다른 데이터로 덮어씌워질 때까지 남아있는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실제 데이터에 ‘덮어쓰기’가 되는 시점은 이용하는 사람 입장에서 사실상 무작위에 가까운데, 삭제된 데이터가 점하는 부분에 바로 새로운 데이터가 덮어쓰기 되도록 조작하면 완전한 삭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레이징에는 방금 삭제한 데이터의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데이터를 덮어씌우는 작업을 구현하는 독립된 프로그램의 개입이 필요하다.

국정원 직원이 '디가우징'을 못한 이유, 엉겁결에 설명된 상황

그런데 위에서 드러난 사실로 보듯 몽고DB의 특정 데이터를 삭제하기 위해 직접 명령어를 입력하거나 RCS의 인터페이스를 이용하는 경우는 이레이징 프로그램이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임모씨로서는 디가우징이나 이레이징을 시도하지 않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이 지적하는 대로 임모씨가 삭제한 데이터의 복구에는 의지만 있었다면 오랜 시간이 걸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국정원이 주장하는대로 ‘분석’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RCS가 수집하는 정보의 특성 등을 감안할 때 이것 역시 긴 시간이 걸릴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국정원의 설명으로는 의혹이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 국회 정보위 여야 간사인 새누리당 이철우(오른쪽), 새정치민주연합 신경민(왼쪽) 의원이 27일 오후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전체회의를 마친 뒤 주호영 국회 정보위원장(가운데)과 함께 정보위 결과를 취재진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새누리당 관계자들은 일관되게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국정원의 해명으로 의혹이 해소됐다는 취지의 주장만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기술적으로 복잡해보이는 국정원의 해명을 그대로 반복 재생산함으로써 문제를 그저 ‘덮으려’는 의지가 반영된 걸로 해석된다. 국정원 역시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기보다는 그저 복잡한 설명을 내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임 모씨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워 곤란한 상황을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기술적으로 복잡한 '설명' 대신 국정원의 '해명'으로 상황 덮으려는 새누리당

이런 상황이니 국정원의 해명을 믿어보자는 목소리도 힘을 얻기 어렵게 됐다. 28일 주요 일간지들은 일제히 국정원에 비판적인 내용의 기사나 사설을 지면에 실었다. 정권에 가장 친화적인 조선일보조차도 야권의 국정원에 대한 공격이 도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이 국정원 쪽으로 돌아서지 않는 데 대해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북한과 마주한 이 나라에서 국민이 정보기관을 불신하는 이 상황이야말로 국정원의 부끄러운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국정원은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결백 주장에만 목청을 높일 게 아니라 싸늘하게 식어버린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썼다. 이들까지 이런 주장에 나서고 있는 것은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언론 역시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국정원이 감시를 위한 도감청에 나선다고 한다면 평소 경쟁적으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는 언론계 인사들 역시 대상이 되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수언론의 이런 태도는 국정원의 각종 불법행위들에 대한 의혹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잘못한 것은 고치며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도록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단지 기술적으로 복잡한 설명과 몇 가지 트릭(?)만으로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국면을 넘어섰다. 청와대와 국정원, 새누리당이 ‘이번 기회에 털고가자’는 자세로 임하지 않으면 같은 문제는 다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때만 되면 터지는 국정원을 둘러싼 의혹은 보수세력의 입장에서도 두고두고 부담스러운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쇠는 뜨거울 때 치라고 했다. 기회가 왔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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