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결정을 미술부 선배에게 알렸을 때 선배 디자이너에게서 ‘부러움’의 얼굴을 봤어요. 아직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저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는… 선배는 밥벌이해야 하는 가장이자 아이를 키우는 모성 사이에서 무겁게 서 있었는 그때 했던 말이 잊히지 않아요. ‘저도 행복하고 싶어요’” _프리랜서 디자이너 이도진 씨

10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과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가 공동주최한 <출판노동 증언대회>가 열렸다.

박세중 출판노동실태조사위원회 위원장은 우선 더 나빠져만 가는 출판업계의 현실을 소개했다. 지난 5년 사이 책 1종 당 평균 발행부수는 2471부에서 2005부로 줄었고 가계 월 평균 도서구입비는 학습지가 11%, 일반 단행본이 25% 감소한 7630원을 기록했다. 한 달에 책을 사는 데 10000원도 쓰지 않는다는 의미다. 1994년 6000여곳에 달했던 전국 서점수는 현재 1000곳으로 급감했고, 서점이 없는 읍·면·동은 전체의 절반을 넘어섰다.

이처럼 ‘흉흉한’ 출판시장의 사정은 출판노동자를 압박하는 ‘현실’로 다가왔다. 지난 5월 12일 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이하 출판노협)이 공개한 <2015 출판노동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매출 하락으로 인한 영향(복수응답 가능)을 묻자 임금이 동결되거나 삭감됐다는 응답이 51%, 돈 되는 책 중심으로 책을 출간해 출판 다양성을 악화시켰다는 응답이 41%, 인원을 감축했다는 응답이 40%, 업무 강도가 강화됐다는 응답이 38%, 복지가 축소됐다는 응답이 34%, 업무가 외주화됐다는 응답이 15%였다. (▷ 관련기사 : <21.2% 계약서 안 쓰고, 50.1% 취업 규칙 모르고, 44.3% 수당 없다>)

영세 사업장의 비중이 높은데다, 5인 이하의 사업장도 많은 만큼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부당한 처우를 받은 노동자들이 적지 않다. 이날 토론회에서도 다채로운 부당노동행위 경험담이 쏟아졌다.

진보 의제 다룬 출판사에서 일어난 ‘부당해고’
문제제기하자 돌아온 건 “니가 알바연대냐?”는 비아냥

소규모 출판사에서 편집자로서 첫 발을 내딛어 1년 9개월 간 일했던 김성현 씨는 노동, 성 소수자, 여성, 환경 등 진보적인 의제를 다루면서 ‘상식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만들고 싶다’고 내세우는 출판사에서 벌어진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 10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과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가 공동주최한 <출판노동 증언대회>가 열렸다. (사진=언론노보 이기범 기자)

김성현 씨는 자신의 직장에 처음에는 큰 불만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오히려 만족하는 편이었다. 때로 오후 5시에 퇴근하거나, 3년마다 근속휴가를 쓸 수 있게 노력하는 등 나름의 복지제도가 잘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입직원만 뽑는 것 역시 자신 같은 사회 초년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려는 의도로 생각해 좋게 보았다. 문제는 ‘계속해서 책이 팔리지 않는 상황’에서 왔다. 매달 평균 2권의 책을 새로 만들어내는 데도 대표는 회사 사정이 회사가 어렵다고 말했다. 몇 달 동안 그런 상태가 유지되었으나, 경영난을 증명할 어떤 자료도 직원들과 공유하지 않았고 이렇다 할 타개책을 내놓지도 않았다고 한다.

대표는 지난해 4월 26일 전체회의에서 ‘회사가 어려우니 각자 천천히 시간을 두고 다른 회사를 알아보자’며 이 과정을 ‘연착륙’이라고 표현했다. 4년차 편집자는 임금을 줄이는 등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했지만 대표는 소용없다고 거절했고, 그로부터 1주일도 지나지 않아 가장 연차가 높은 7년차 편집자를 불러 5월 9일까지 일하라고 통보했다. 직원들 모두 일방적이고 갑작스런 해고 통보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고, 해고예비수당을 줘야 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갑작스런 7년차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갑작스레 잘린 ‘해고 사태’는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불가피하게 두 사람을 해고해야만 했던 경영상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설명을 요구하자 “세상 어느 출판사도 회사 경영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며 으름장을 놨던 대표는 노트에 직접 써 온 책 판매량을 알려주며 “나도 올해 처음 수치를 확인했는데 이렇게 사정이 어려운지 몰랐다”고 말했다. 김성현 씨는 “그동안 회사를 운영하면서 책이 몇 권 팔린지도 몰랐으면서 도대체 무슨 근거로 사람을 해고하고 어떤 해결책을 고민했는지 의문이어서 그 자리에서 문제제기했다. 그때부터 일을 그만둘 때까지 계속 불화를 겪었다”고 밝혔다.

부당해고 문제를 지적하면 대표는 “노동법을 누가 더 잘 알겠느냐. 내가 너보다 잘 안다”며 화를 내거나 “니가 알바연대냐? 운동단체 활동하냐”면서 비아냥거렸다. 해당 출판사는 알바연대를 인문사회 교양서 저자로 섭외하려고 했다는 것은 웃지못할 아이러니다. 그만두겠다고 하자 대뜸 월급을 나눠서 지급할 수도 있다고 해, 회사가 얼마나 어려운지 납득할 만한 확실한 경영정보를 알려달라고 하니 통장 잔액란을 펼쳐 보이며 “당신 월급은 빚을 내서라도 준다, 장기 팔아서라도 준다”는 식으로 말했다. 사직서에 ‘일신상의 이유로 그만둔다’고 쓰라고 ‘명령’하고는 거부하자 “지금 날 엿 먹이냐”며 크게 화내고 노려보는 등의 위협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사직서를 늦게 처리하면 다음 달 보험료가 나간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7년차 직원들을 부당해고한 것을 두고 대표는 끝까지 ‘자기희생’이라고 표현했으며, 그러니 밖에서 부당해고라고 하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김성현 씨는 “그동안 노동권 보장이나 부당해고 철폐를 이야기해 왔지만, 자신 일터에서 일어났을 때는 관련 법규나 기준을 자기 편한 식으로 왜곡하고 매우 감정적인 일로 생각해 합리적인 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고 전했다.

근로계약서도 쓰지 못한 채 ‘권고 사직’ 통보

일하는 출판사도, 각자의 경력도, 성별도 나이도 달랐지만 출판노동자들의 경험담은 대개 비슷했다. 노동자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법에 보장된 권리’조차 무시당하기 일쑤였다는 게 공통점이었다.

“입사 당시에 저는 근로계약서 작성도 하지 않고 배부도 받지 못했다. (…) 지난 3월 말에는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팀 개편 때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편집주간으로부터 권고사직을 제안 받았다. 거절하자 어떤 대화도 절차도 없이 파주에 소재한 물류창고로 인사가 나더라. 6월 26일 원직 복귀 주문이 났지만 저는 현재까지도 물류창고에서 근무 중이다. 수없이 많은 폭언과 고성을 듣기도 했다. 강병철 사장은 회의 당시나 술자리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직원들에게 모욕감 주는 행동을 했다. ‘취미생활은 집에 가서 해라’, ‘X만한 XX’, ‘나가’ 등… 술자리에선 성희롱에 가까운 말을 하기도 했다. (…) 이게 과연 정상적인 출판노동의 모습인지 모르겠다. 출판노동자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책을 만든다고 상상해 보라. 어떤가” _자음과모음 편집자 윤정기 씨

“정직원 된 지 3개월 만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처음 겪어보는 일에 크게 당황했지만 근로계약서도 교부하지 않은 회사의 부당함을 알리는 짤막한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많은 분들이 읽고 공유해줬다. 위기감을 느낀 사측은 저를 비롯해 관계자를 소집해 해고 철회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이 해고와 철회라는 일련의 사건들을 어떤 기사에서는 ‘해프닝’이라고 하더라. (…) 해고 사건 있고 나서 1년 후에 퇴사했다. 문득 근무환경이 1년 동안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퇴사 결정을 미술부 선배에게 알렸을 때 선배 디자이너에게서 ‘부러움’의 얼굴을 봤어요. 아직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저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는… 선배는 밥벌이해야 하는 가장이자 아이를 키우는 모성 사이에서 무겁게 서 있었는 그때 했던 말이 잊히지 않아요. ‘저도 행복하고 싶어요’ 왜 출판노동자로서 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출판노동자로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드러나지 않은 부당한 일들은 더 많을 것이다. 많은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으면 좋겠다” _프리랜서 디자이너 이도진 씨

▲ (사진=언론노보 이기범 기자)

“6월 30일에 갑작스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 전날까지도 야근했는데, 출근 1시간 뒤에 권고사직이라는 이름으로 해고 시점과 회사의 입장을 전달받았다. 회사 경영상의 악화를 들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과다한 업무량을 소화해야 했던 데다 아무 절차 없이 해고 통보를 받아 거부하자, ‘이기적’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퇴사일을 7월에 맞춰서 퇴직금을 받게 해주겠다고 생색을 냈고, 회사가 주는 게 아님에도 실업급여 지급 여부가 회사에 있다는 듯 말했다. 권고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바로 해고하겠다고 했다. 5인 미만 사업장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해고가 가능하다고 당당하게 말하더라. 알고 보니 같이 일하는 디자이너는 회사 상부 법인 소속이었다. 정확한 인원을 알았다면 근로기준법 기준에 미치지도 않는 이런 회사에 지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업무량도 포화상태였다. 단순 진행되는 원고까지 편집자 1명당 10개가 넘어갔다. 편집과 디자인을 외주로 돌려도 내부에서 할 일이 없는 게 아닌데도, ‘왜 이렇게 일이 더디냐. 네가 한 게 뭐가 있냐’ 이런 반응이었다. (…) 외주에게는 통상 페이의 1/2, 1/3 정도를 제시하고는 이것저것을 요구하고, 겨우 일을 마치면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며 속된 말로 페이를 ‘후려치기’도 했다. 페이 문제를 외주노동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어떤 때는 너무 페이가 낮아서 조정이 필요한 것 같다고 문제제기를 했더니, ‘외주랑 친구먹으면 좋냐’면서 진정한 사원의 자세에 대해 설명했다”_송혜진 스코어 편집자

“임신하면 임신 초기(12주 이내) 휴가, 단축근무, 3개월 출산휴가가 주어지고 이걸 제외하고도 만 1년의 육아휴직이 제공되지만, 대부분 출산휴가만 지켜진다고 보면 된다. (…) (전 직장에 있을때 아이를 낳았는데) 제 직속상사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구분하지 못했다. 관리자급 직원들이 이 현실이나 정책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직속상사의 권한이 너무 크다는 것도 휴직, 휴가 받는 데 있어서 장애가 많이 되는 것 같다. 물론 사장 한 명이 좌지우지하는 회사들도 있지만 어느 정도 규모 팀이 되면 그 각 팀이 작은 회사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직속상사의 의지라든가 선의에 호소해야 한다는 점이 제 경우에 힘들었다. 사장의 눈치를 본다기보다 동료 선후배 직원들에게 끼칠 영향, 민폐 때문에 육아휴직은 말도 못 꺼낸다. 관리, 기획, 제작, 홍보까지 1인이 많은 책임을 지고 있어서 (자리가 비면) 업무 제대로 못할 거라는 인식이 관리자급에게 팽배해 있다. 대체인력 채용도 편집자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한다” _임수선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부 편집자

출판노협은 이에 대해 노동기본권을 강화하고 차별과 폭력 없는 출판산업을 만들며 좋은 책을 만드는 행복한 노동이 되기 위한 방향 아래 정책을 제안했다. 우선, 노동기본권 강화 방안으로는 △근로계약서 작성 △법정 연차 유급휴가 및 연장근로/휴일근로 수당 지급 △파주출판단지 등 출판사 밀집 지역에서 근로감독 강화를 들었다. 여성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개선하기 위해 △임신·출산·육아 등 모성보호 제도 강화 △실효성 갖춘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 등이 제안됐다.

‘좋은 책 만드는 행복한 노동’ 세부 정책은 △세종도서 사업 및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예지 지원 사업 △서울북인스티튜트, 출판예비학교 과정에 노동법 강좌 의무화 △출판사 사용자 교육 △외주출판노동자 보호를 위한 출판물 불법 유통 신고센터의 기능 개편 및 확대 △출판노조에 권한 부여 등 6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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