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가 예전 같지 않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다른 여가를 즐기는 것 같지도 않은데 드라마를 외면하고 있다. 아마도 대중의 취향과 높아진 수준을 드라마 제작이 따라잡지 못한 데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따로 취향을 돌리지 못하는 드라마 마니아들은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될 때마다 명작을 학수고대하지만 결국 또 실망하는 악순환이 계속 되고 있다.

그런 지독한 드라마 침체 속에 주연 배우들의 무게감이 많이 떨어진 것도 감지된다. 드라마가 기승전결을 온전히 갖추지 못하더라도 때로는 주연배우의 연기와 존재감만으로도 기본은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근래의 드라마들은 그나마도 없어 보인다. 그래도 드라마를 빼고는 티비를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마다 속는 셈치고 기대를 걸어보지만 대체로 첫 회에 실망을 하게 된다.

이준기의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가 시작됐다. 이준기의 연기를 좋아하지만 요즘 드라마들에 하도 속아서 기대 반에 우려가 반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주요 배역의 캐스팅이 썩 마음에 차지 않은 점이 크다. 결국 이준기가 원톱으로 드라마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나갈 수밖에 없는 캐스팅 구조였다.

역시 첫 회는 이준기가 다 했다. 또한 이수혁 역시 크게 흠 잡을 데 없이 흡혈귀 연기를 소화해냈다. 이유비와 심창민에 대한 부분은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분량이 적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려가 더 큰 것은 사실이다. 이준기의 고군분투에 이들의 역할이 보태기가 될지 빼기가 될지가 지상파 첫 뱀파이어 드라마라는 시험의 성적서를 쓰게 할 것이다. 연기는 배우의 역량이지만 드라마는 그 연기들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들을 접어둔다면 ‘밤을 걷는 선비’ 첫 회는 이준기의, 이준기에 의한 완력으로 끌어감으로써 몰입도는 매우 높았다. 세상에 대충 연기하는 주연배우는 없겠지만 이준기의 연기는 항상 배역에 대한 해석 이전에 참 열심히 한다는 느낌을 시청자에게 전해준다. 어쩌면 이 드라마를 기다린 이유 전부가 될지도 모를 강한 믿음이자 기대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준기는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준기는 주연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온몸으로 지는 배우다. 무엇보다 양익준에게 물려서 뱀파이어가 되고, 뱀파이어로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의 피를 빨아야 하는 상황을 정말 절절하게 표현해냈다.

그 부분은 앞으로 이 드라마의 성패가 달린 중요한 장면들이었다. 히어로일수록 슬픈 배경이 있어야 더욱 정이 가기 마련이고, 말 그대로 핏빛 저주에 대한 몰입과 공감을 줄 수 있어야 이 낯선 실험이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뱀파이어 전설은 외래의 것이라 갓 쓰고 도포 쓴 조선을 배경으로 뱀파이어의 존재를 묘사한다는 것이 자칫하면 우스워질 수도 있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준기의 연기는 섬뜩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런 이준기의 설득력에 도움을 준 것은 김소은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정인을 구하려는 애틋함을 김소은이 잘 소화해냄으로써 이준기의 비극적 운명에 감정을 싣게 해주었다. 그래서 저렇게 죽고 끝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다행스럽게도 120년 후 다른 역할로 등장하게 된다. 인물 설명에는 120년 전의 인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이수혁과의 관계에 어떤 복선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여 의외로 드라마 비중이 더 커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밤을 걷는 선비’는 몰입하기 쉽지 않은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첫 회에 보인 이준기의 열연으로 오랜만에 기대를 갖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익숙하면서도 요즘으로서는 낯선 흥분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