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KBS에선 이인호 KBS이사장이 긴급 소집한 임시 이사회가 열렸다. ‘보도의 정확성 제고 방안에 관한 보고’가 표면적 주제였으나 실상은 지난달 24일 방송된 KBS <뉴스9>의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 기사의 취재, 보도, 삭제, 반론보도의 경과를 청취하는 자리였다.
긴급 이사회 소집으로 KBS 안팎이 시끄러웠다. 야당 추천 이사 4인은 이승만 정부 망명 보도라는 개별 보도 내용은 이사회 안건으로 채택할 수 없고, 소집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다며 강력 반발했다. 이사회는 여야 이사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해 20분 간 정회되기도 했다. 재개된 회의에서 이인호 이사장을 비롯한 일부 여당 추천 이사들은 KBS 보도를 “사회적 혼란을 일으켰다”거나 “보도한 기자가 아주 무지하거나 특종을 바란 것 같다”고 평가했고 “(이런 보도가) 우리나라 국익에 무슨 이득이 있느냐. 반세기가 지난 마당에…”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보도 품평회를 방불케했다.
이인호 이사장 “얘기해선 안 되는 사안은 없어… 좋은 의견 있으면 제시해야”
이인호 이사장은 회의 앞머리에서 “(이런 보도가 나왔는데) 공영방송이 뭐하는 거냐. KBS가 친일세력이냐. 이사들은 다 돈만 받아먹고 특전만 누리고 뭘 하는 거냐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며 “우리 이사회에서도 우리도 생각이 있고 집행부도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회의 소집 이유를 밝혔다.
▲ KBS이사회 이인호 이사장 (사진=연합뉴스)
이인호 이사장은 “사흘 만에 수도가 함락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남고 나라를 지키는 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비방해서 발끈하는 게 있는 것 같다”며 “(이사회를 열어서) 보도 공정성과 독립성을 침해하려는 것 아니냐며 물리적으로 제재하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결국 보도의 정확성, 방송의 품질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종북좌익척결단·나라사랑어머니연합 등 극우 성향 단체들의 반발을 ‘대변’하고 그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사회를 긴급히 연 것이 아니냐는 야당이사들의 주장에는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 했다면 (보도 직후인) 열흘 전에 소집했겠죠. 지난 일요일(5일)까지도 그대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KBS 애청자라고 하는 축에서 너무 KBS를 비방하는 소리가 나와서…”라고 맞받았다.
이인호 이사장은 “저는 이사회에서 얘기해서는 안 되는 사안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언론 자유가 보장돼 있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해) 이사들이 지혜를 모으면 모을수록 좋은 건데… 뭘 결정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권리를 제한하자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독립성, 공정성 뭐 이런 것 때문에 이사들은 프로그램에 대해 얘기해선 안 된다는 건 법(<방송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보도·편성 과정에 관여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좋은 질의 방송이 나가느냐에 대한 책임은 이사들이 져야 한다.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 하는 것은 제작자들이 하는 것이고. (이사들은) 자유롭게 발언해야 하고 발언할 권리가 있다는 것 이상으로 좋은 의견이 있으면 제시하는 게 맞다고 본다. 정치적인 눈으로 편파적이라고만 볼 게 아니라”라고 밝혔다.
“이승만 망명 보도가 국익에 무슨 이득이 되느냐”
여당이사들은 이승만 정부가 한국전쟁 당시 일본 측에 망명을 요청했다는 보도가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며 정식 안건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도 내용 자체가 아주 잘못됐다며 강력하게 비판하는 이사도 있었다.
이병혜 이사는 “(이승만 정부 망명 보도는) 보도한 기자가 아주 무지했거나 특종을 바랐거나,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국가를 대표하는 공영방송 KBS라는 그런 걸 게이트키핑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권오훈, 이하 새 노조)가 이승만기념사업회의 주장을 바탕으로 나간 이례적인 반론보도가 ‘굴욕적’이라고 지적하자, 이병혜 이사는 “KBS는 정말 자존심도 없나. 다들 화성에서 오셨나. 일본 시골 야마구치현 현사에 나온 걸 가지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승만 대통령 일본 망명 요청설과 관련해서 논란이 있으니까, KBS가 국가 정체성을 지키고 국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서 방송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사회가 열렸다고 봐 주시면 좋겠다”며 “우리(여당이사들)라고 KBS가 잘못되길 바라겠는가. 풍문으로 들었소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된 공영방송이 되기 위한 하나의 자리로 인식해 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임정규 이사는 “이승만 대통령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고 독립운동가이며 최고의 석학자다. 잘 때도 권총 들고 자면서 ‘나는 여기서 죽겠다’고 하는 분이 야마구치현에 망명 정부 세운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걸 보도한 것 자체가 실수한 거다. 이번 보도는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닌 것 같고 공명심에서 자료를 들추다 보니까 보도한 것 같다. 이 부분을 우리 이사회가 너무 깊이 관여할 건 아니지만 수수방관할 사안도 아니다. (이 보도가) 우리나라 국익에 무슨 이득이 있느냐, 반세기가 지난 마당에”라고 말했다.
이상인 이사는 “누구든지 방송편성에 관하여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는 <방송법> 제4조 2항을 언급하며 “이 부분은 저희 이사회에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다. 일부 기자, PD들은 이 조항을 들어 자신들이 보도하고 제작한 프로그램을 이사회에서 언급하는 것조차 잘못된 것이고, 이사들이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건 기본 방송이론과 대법원 판례를 오해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상인 이사는 “4조 2항의 취지는 국가권력이라든가 외부 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보도 기능이나 제작 기능에 문제가 발생했으면 얼마든지 이사회에서 논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동안에는 가능하면 집행기관의 자율성에 맡기도록 해서 (의견 표명을) 자제해 왔기 때문에 정식 이사회에서는 안건으로 다루려는 것을 회피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최양수 이사 역시 “(이번 이승만 보도는) 중요한 사회적 의제 설정해서 건설적 논의 촉발되게 하기보다는 정파적인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KBS이사회도 왜 이 논란의 원인이 뭔지 어떻게 이 사건이 진행돼 왔는지 알고, 혼란이 확산되거나 재발되는 것을 막을 책무가 있다고 본다”고 동조했다.
반면 일부 여당이사들은 보도 내용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펼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양성수 이사는 “보도 과정에서 지시나 압력이 있다면 문제가 되지만 사후 건과 관련해서는 얼마든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고 본다”면서도 “이것과 관련해 임시 이사회를 열어서 안건을 정식 논의하는 게 적절한 것이냐는 건 다른 문제”라고 밝혔다. 한진만 이사 또한 “이사로서 직접적으로 프로그램 가타부타 얘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 퀄리티를 높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이사들 “이사회 소집은 불법”… 이인호 이사장 사퇴 촉구
반면 야당이사들은 개별 보도 내용을 안건으로 삼은 것 자체가 문제라는 입장을 유지한 채, 이인호 이사장에게 의안 철회를 촉구했다. 이규환 이사는 “저는 오늘 이 자리가 차후로는 이런 문제를 논의하지 않는 것으로 약속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이사장님 개인으로서 의견 가지는 것을 누가 뭐라 하겠나. 그러나 적어도 방송에 관한 한, 방송 제작 현장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맡겨야 한다. 일일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가르치려하고 그대로 따르기를 원하신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비판했다.
최영묵 이사는 “운영위원 체제를 전혀 거치지 않고 이사회를 이사장이 단독 소집한 것도 처음이고, 단일 보도를 가지고 집중 논의하거나 이사회를 열어본 적이 없다”며 “단일 보도를 다루면 (제작자들이) ‘이렇게 하면 문제가 되겠구나, 이건 하지 말자’ 하면서 표현의 자유가 심대하게 위축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안건 제출의 절차적 합당성도 결여되어 있고 내용도 <방송법>을 침해하는 것이기에 소집에 반대했던 것”이라며 이인호 이사장에게 “안건 상정을 자진 철회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조준상 이사는 “이사장은 사회적 파장을 낳는 보도, 사회적 혼란을 낳는 보도를 헷갈리고 있다”며 “이사장 개인의 가치관과 역사관을 투영하려는 시도다. 그래서 회의도 공개한 거라고 본다. 밖에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잘라 말했다. 김주언 이사도 “(이 보도에 대해) 사회적 혼란이라고 말씀하시는데 특정 이념세력이 피켓 시위하면 다 사회적 혼란인가”라며 “(이번 이사회 개최는 이사장이) 특정 집단의 대변인 역할에 머물러 있다는 의도로 저는 받아들인다”고 전했다.
앞서 야당이사 4인은 이사회 개최에 앞서 성명을 내어 “독단과 독선, 아집과 편견으로 대한민국 대표 공영방송 KBS이사회를 무력화하고 있는 이인호 이사장은 KBS와 KBS이사회를 위해 즉각 사퇴하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한편 이사회가 열리기 전, 새 노조는 ‘불법적인 보도 개입 이사장은 퇴진하라’, ‘공정보도 훼손하는 불법심의 중단하라’ 등의 문구가 쓰인 피켓을 들고 이인호 이사장을 규탄하는 피케팅을 벌이려고 했으나 사측의 제재로 인해 본관 출입부터 막혀 무산됐다.
▲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KBS기자협회는 8일 이사회 개최에 앞서 보도 개입을 규탄하는 피케팅을 벌이려 했으나 사측의 제재로 무산됐다. ⓒ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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