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두 사람의 예술인이 세상을 떠났다. 극심한 생활고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던 고 김운하 씨는 한 평 남짓의 고시원 방에서 기다리던 연극 출연을 며칠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고, 비록 한편의 주연작을 남겼을 뿐이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20여 년 간 배우의 길을 걸었던 판영진 씨는 생활고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예술인들의 죽음 앞에 언론은 예술인들의 고단한 삶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정치인들은 이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을 거라 약속하지만 예술인들의 현실은 다시 제자리다.

2011년, 최고은 작가가 가슴 아픈 쪽지 한 장을 세상에 남기고 떠났을 때 우리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는 수년간 국회를 떠돌며 애물단지 취급만 받던 <예술인복지법>이 세상의 빛을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비극은 반복되고 예술인들의 고단한 삶은 여전하다. 신문지면에 실린 예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수밖에 없다는 어느 예술인의 인터뷰 기사는 2011년의 기사를 복사해서 붙여놓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이 기시감은 단순히 현실이 바뀌지 않았다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 시나리오 작가 고 최고은씨가 남긴 쪽지ⓒ민중의소리

예술인복지를 위해 2012년 <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되고, 2013년에는 예술인복지재단이 만들어졌으며, 2015년에는 204억의 예산이 예술인복지를 위해 편성되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에는 국정기조로 문화융성을 내세우며 더 이상 생활고로 인해 예술의 꿈을 접는 예술인이 없게 하겠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한류열풍으로 대표되는 문화산업 시장은 해마다 성장을 거듭하고 있고 주말마다 도심 곳곳에서는 시민들을 위한 전시와 공연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말 그대로 문화예술의 전성기가 도래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풍경에도 불구하고 예술인들은 여전히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고 비극은 반복되고 있다. 이는 예술인들을 둘러싼 삶의 조건이 더욱 악화되고, 예술인에 대한 착취가 우리사회에 구조화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공공예술, 도시재생, 예술교육 등 다양한 사회적 영역에서 예술인들이 동원되고 있으며 산업영역에서 문화예술이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높아져 가고 있다. 하지만 예술인들은 제대로 된 계약서 하나 쓰지 못하고, 4대 보험은커녕 최저 임금만도 못한 보수를 받으며 알량한 지원금이라도 받기 위해 무한경쟁을 반복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행 <예술인복지법> 중심의 예술인복지제도의 실패는 어찌 보면 예견된 것이었다. <예술인복지법> 제정 당시 많은 예술인들과 정책 전문가들이 시혜적인 지원제도 중심의 예술인 복지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보편적 복지체계로의 예술인의 편입과 개별 예술 활동의 특수성에 따른 보조적인 지원제도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예술인에 대한 노동의제를 <예술인복지법> 상에 반영하여 예술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확인하고 구조적 착취에 대한 안정장치를 마련 할 필요가 있음도 지적하였다. 이는 예술인복지법 제정 당시 정병국, 서갑원, 전병헌 의원 등이 각각 국회에 발의했던 의안들을 살펴봐도 알 수 있는데, 여야를 떠나 예술인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4대 보험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 발의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고은 작가의 죽음 이후 <예술인복지법>이 급조되는 과정에서 이 내용들은 관계부처 간의 협의 문제, 근로기준법 등 관련 법률상의 문제, 학습지 교사 등 특수고용노동자들과의 형평성 문제 등을 이유로 삭제되고 <예술인복지법>은 예술인복지제도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이 빠진 채 예술인복지재단 설치와 관련한 내용만으로 제정되었다. 이는 결국 예술인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그대로 놔두고 예술인 복지라는 이름의 또 다른 지원 사업만을 만들어 예술인들을 줄 세우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 고 김운하 님과 고 판영진 님의 모습

예술인들의 경제적 위기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대중들에게 드러나곤 한다. 그리고 이는 ‘가난한 예술가’라는 이미지와 결합해 드라마틱한 서사를 만들어내곤 한다. 사람들은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예술인들의 비극을 위로하지만 이러한 정서적 교감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술인을 둘러싼 이미지를 걷어내고 사회적 존재로서 예술인의 현실을 이해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인 스스로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예술은 이미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구조 위에 서 있고 예술인에 대한 착취는 일상화 되어 있다. 더 이상 예술인의 빈곤은 예술을 위해 예술인 개인이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짐이 아니며 예술을 위한 필요조건도 아니다. 예술이 경제적 보상체계로부터 자유로울 때 예술로서의 순수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이제 예술인의 빈곤과 생존의 문제는 사적 영역을 벗어나 사회적 영역에서 논의되어야 하며 시혜적 지원의 개념이 아니라 예술인의 사회적 권리로 이야기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술노동의 관점에서 예술인복지제도 전반에 대한 재설계가 필요하다. 예술인 복지의 문제를 보편적 복지제도의 확장과 변화하는 노동형태에 따른 새로운 노동의제의 설정이란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임금노동에 기반을 둔 노동의제로는 예술인뿐만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돌봄노동, 여가노동, 감정노동 등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의 노동을 담아 낼 수 없다. 사용종속성 중심으로 노동자성을 규정하는 현행 근로기준법 기준들은 우리사회에 더 큰 사각지대를 만들어 낼 것이며 그 사각지대에 예술인들도 포함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을 둘러싼 제도와 현실의 이 간극을 메우지 않는 이상 그어떤 지원 제도를 만든다 해도 예술인의 빈곤은 계속해서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개별 예술 활동의 특수성에 기반을 둔 맞춤형 지원정책을 통해 지속가능한 예술 활동의 생태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개별 예술 활동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않은 채 예술인복지재단의 사업 중심으로 진행되는 지금과 같은 지원정책은 예술인들에 대한 과도한 줄 세우기와 경쟁만을 부추길 뿐이다.

얼마 전 두 예술인의 죽음이 언론을 통해 널리 보도된 이후, 기재부는 보건복지부의 긴급복지지원과 지원 성격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예산 교부를 거부하고 있던 2015년 창작준비금지원 예산 110억을 부랴부랴 문화부를 통해 내려 보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산 교부를 거부하고 어깃장을 부리던 기재부가 두 예술인이 세상을 등지고 나서야 결단 아닌 결단을 내린 것이다. 불과 며칠 만이었다. 물론 이 예산이 집행되지 않은 것이 두 예술인이 세상을 떠나게 된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예술인복지와 관련해 행정 관료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능한지를 잘 보여주었다. 예술인은 없고 행정 관료들의 이해만 남은 채 방향을 잃고 있는 예술인복지제도로 인해 얼마나 더 많은 예술인들이 상처를 받아야 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바로 지금이 예술인복지제도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논의해야 할 시점이며 예술인을 둘러 싼 착취구조를 전복하기 위한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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