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수의견>에 등장한 기자 공수경(김옥빈 분)은 평범하다. 출입처가 배포하는 보도자료를 의심하고 자신의 눈과 사진을 믿으며 취재를 시작하는 기자다. 데스크에 자기검열 탓에 청와대발 여론조작 문건을 못 쓰지만, 한 사건을 집요하게 취재하고 결국 단독도 해내는 그런 사람이다. 영화에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물집’을 터뜨리는 기자다.

물론 휘둘리지 않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백원짜리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하는 변호사 윤진원(윤계상 분)은 청와대발 여론조작을 보고 “방송은 이제 완전 맛이 갔어”라고 혀를 차고, 윗대가리 검찰은 네이버 뉴스스탠드에 실린 언론사의 헤드라인을 모니터링하며 큰집에 “언론도 프레임이 나쁘지 않다”고 보고한다. 지금 한국 언론이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다. 취재원에게 제아무리 “저, 이거 기사 씁니다”라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는 상황이 이럴 때다. 정황만으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공수경의 동료가 말했듯 “발제해봤자 킬”이다.

▲ 영화 <소수의견> 한 장면 (사진=네이버 영화정보)

그래서 공수경은 현실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자다. “이거, 소설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는 취재원이 기자에게 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자신의 의심이 합리적이라며 의견을 조직하는 사람은 취재원인 변호사가 아니라 기자 공수경이다. 그는 정보가 많은 정치인을 섭외하기까지 한다. “쓰느냐 마느냐는 내가 판단한다” “기자는요, 누군가에게 미안하기 시작하면 기사 못 써요”라고 말하는 강단 있는 기자는 현실에 있을지 몰라도 공수경처럼 행동하는 기자는 거의 없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언론을 욕한다. 사실 웬만큼 뉴스를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자들을 비난한다. 우리사회 기자들 중 일부는 회사의 지시에 따라 실시간검색어 기사를 한두 문장만 바꿔 반복해 포털사이트에 전송하는 ‘어뷰징’(동일기사 반복전송)에 동원되고,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기사를 쓰고, 출입처를 뱅뱅 돌며 보도자료를 베껴 쓰며 하루하루 연명한다. 자본과 권력에 복무하면서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밑밥’ 기사를 쓰기도 하고, 광고와 바꿔먹을 기사를 쓰거나 직접 광고영업을 해 연봉을 높이기도 한다. 그래서 ‘기레기’ 취급을 받는다.

▲ 영화 <소수의견> 한 장면 (사진=네이버 영화정보)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은 기자들이 대부분이다. 여전히 많은 기자들은 건수와 트래픽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회사에 불만을 갖고 있고, 휘갈겨 쓴 자신의 기사를 반성하고, 출입처를 흔드는 기사를 쓰려고 노력한다. 석연찮은 이유로 자신이 기사를 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다른 매체의 믿을 만한 기자에게 정보를 넘기고 취재원을 소개하는 기자도 많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이 기사를 쓰지 못한 사정을 미디어스 같은 매체에 제보하고, 스스로 사표를 던지기도 한다.

기자들은 매일매일 쏟아지는 보도자료와 취재원에 치여 살지만, 메이저와 마이너를 가리지 않고 어떤 기자들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중요한 정보는 대개 ‘영향력’ 있는 매체로 흘러 들어가지만, 정보를 쥔 취재원이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은 공수경 같은 기자다. 끈질긴 취재로 사실을 확인하고, 정확하게 보도할 수 있는 기자가 있어야 물집을 터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단독’을 남발하는 언론이긴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수백건씩 쏟아지는 단독기사는 이런 과정이 없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다.

▲ 영화 <소수의견> 한 장면 (사진=네이버 영화정보)

문제는 영향력 있는 매체마저 공수경 같은 기자들을 키워내지 못하고 있는 데 있다. 위기는 주류매체까지 넘어온 지 오래다. 심지어 한겨레마저 개인별 성과를 계량화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ex)라는 이름으로 기자들을 관리한다. 광고를 따오면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언론이 수두룩하고, 박봉에 시달리는 기자들은 쪼개졌고 오늘도 광고영업 중이다.

큰집 청와대가 공영방송사 사장을 결정하고, 정부는 말 안 듣는 언론사에는 광고를 끊는다. 박정희 정권 시절마냥 촌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그들은 언론을 이렇게 관리한다. 지금 기자들은 윗선의 소수의견을 다수의견으로 만드는 스피커 역할을 요구받는다. 드라마 <프로듀사>에는 언론인이 기댈 곳으로 노동조합이 나오지만, 웬만한 언론사 노조는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들다.

이러는 와중에 언론사들은 너도나도 탐사보도를 강화하고 전문기자를 키우겠다고 한다. 인터랙티브뉴스와 카드뉴스를 제작하기도 한다. 콘텐츠 큐레이션을 뉴저널리즘으로 추켜세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정작 ‘저널리즘’에 충실한 언론은 줄어들고 있다. 공수경 같이 평범한 기자가 설 곳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건 소설이 아니다. 평범한 기자를 보고 씁쓸한 것은 이래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따위 뉴저널리즘이 아니라 그냥 저널리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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