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데스노트>는 한국 무대에 오르지 못할 뻔한 공연이었다. <데스노트>를 처음 한국에 도입하려고 한 제작사는 원래 씨제스컬쳐가 아닌 뮤지컬해븐. 헌데 뮤지컬해븐은 작년에 법정관리를 당하고 만다. 때문에 <데스노트>의 한국 공연은 물 건너가나보다 싶었는데 씨제스컬쳐가 뮤지컬해븐을 대신하여 한국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데스노트>의 세계관은 영화 <데스티네이션>의 세계관과 맞닿는다. 영화 속에서 죽기로 된 사람들은 죽음을 피해보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에는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뮤지컬 역시 데스노트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가도 모르고 죽음과 키스하고 만다. 이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한다 한들 데스노트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죽음이라는 결정론이 우세한 ‘결정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배우들의 호연을 뒷받침할 연출이나 서사가 탁월했으면 좋으련만, <데스노트>는 연출의 한계로 인해 배우들의 호연이 빛을 잃은 듯하다. 박혜나가 연기하는 렘이라는 캐릭터를 보면 <데스노트>의 한계가 두드러진다. 정선아가 연기하는 미사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미사를 위해 헌신적이 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2막을 시작할 때 렘은 미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미사를 흠모한 이들 가운데에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신도 있었는데, 한 사신이 사신은 인간을 도와주지 못한다는 규율을 어겨가면서까지 미사를 도와주려고 하다가 모래로 변했다고 말이다. 사신은 인간이 하는 일에 개입할 수 없다는 한계를 미사에게 지적한 이는 다름 아닌 렘이다. 그런데 뮤지컬은 너무나도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렘이 왜 그토록 미사를 위해 헌신적으로 다가서고 도와주려고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결말의 인위적인 숭고함도 지적해야 할 부분이다. <데스노트>의 결말은 뮤지컬 <로빈훗>의 결말과 일부 궤를 같이 한다. <데스노트>는 허무한 결말을 완화하기 위해 앙상블의 합창으로 마무리한다. 이는 <로빈훗>에서 로빈훗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는 허무한 결말을 보완하기 위해 1막의 결말을 2막 마지막에 가져다 넣은 것처럼, <데스노트>에서 라이토의 하마르티아, 인격적인 결함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결말을 ‘무언가 있어 보이게끔’ 만들기 위해 고안한 앙상블의 합창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뻥튀기 연출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뮤지컬의 연출적, 또는 서사적인 구멍은 제아무리 뮤지컬계의 드림팀으로 짜인 배우들이라 한들 손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아닐 수 없다. 잘 짜여진 배우들의 신선함이 빛을 바랜 B급 레시피 요리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어찌 하랴, 원작을 한국 정서에 맞게 개선할 수 없는 레플리카(Replica - 대본, 음악, 동선 등을 변경 없이 그대로 옮겨 오는 것) 뮤지컬이기에, <데스노트>의 한계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