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데스노트>는 한국 무대에 오르지 못할 뻔한 공연이었다. <데스노트>를 처음 한국에 도입하려고 한 제작사는 원래 씨제스컬쳐가 아닌 뮤지컬해븐. 헌데 뮤지컬해븐은 작년에 법정관리를 당하고 만다. 때문에 <데스노트>의 한국 공연은 물 건너가나보다 싶었는데 씨제스컬쳐가 뮤지컬해븐을 대신하여 한국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데스노트>의 세계관은 영화 <데스티네이션>의 세계관과 맞닿는다. 영화 속에서 죽기로 된 사람들은 죽음을 피해보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에는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뮤지컬 역시 데스노트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가도 모르고 죽음과 키스하고 만다. 이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한다 한들 데스노트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죽음이라는 결정론이 우세한 ‘결정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 뮤지컬 ‘데스노트’ 류크-강홍석 ⓒ씨제스컬쳐
일 년에 백 편 이상의 공연을 관람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뮤지컬 <데스노트>는 최근 몇 년 동안 본 공연 가운데서 장점과 단점이 확연하게 두드러지는 아주 특이한 공연이었다. 장점이라면 배우들의 연기다. 배우의 연기가 얼마만큼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뮤지컬 팬이라면 <닥터 지바고>에서 이미 경험하지 않았는가. 뮤지컬계의 흥행 보증수표 김준수를 비롯하여 웨스트엔드에서 이제 갓 돌아온 ‘꿀성대’ 홍광호, 기괴함과 개그를 자유자재로 유영하는 강홍석의 연기는 만화 원작이라는 레시피에 감칠맛을 더하는, 싱싱하고 맛깔나는 연기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런 배우들의 호연을 뒷받침할 연출이나 서사가 탁월했으면 좋으련만, <데스노트>는 연출의 한계로 인해 배우들의 호연이 빛을 잃은 듯하다. 박혜나가 연기하는 렘이라는 캐릭터를 보면 <데스노트>의 한계가 두드러진다. 정선아가 연기하는 미사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미사를 위해 헌신적이 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2막을 시작할 때 렘은 미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미사를 흠모한 이들 가운데에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신도 있었는데, 한 사신이 사신은 인간을 도와주지 못한다는 규율을 어겨가면서까지 미사를 도와주려고 하다가 모래로 변했다고 말이다. 사신은 인간이 하는 일에 개입할 수 없다는 한계를 미사에게 지적한 이는 다름 아닌 렘이다. 그런데 뮤지컬은 너무나도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렘이 왜 그토록 미사를 위해 헌신적으로 다가서고 도와주려고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 뮤지컬 ‘데스노트’ 미사-정선아,렘-박혜나 ⓒ씨제스컬쳐
2막에서 엘은 라이토가 키라일 가능성이 3%라는 점을 언급하며, 다른 용의자에 비해 라이토가 용의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걸 지적한다. 한데 뮤지컬은 라이토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어야 하는가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3%라고 하는 수치가 다른 용의자에 비해 왜 높은가에 대해 관객이 납득하게끔 엘이 설명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뮤지컬은 3%라는 수치만 달랑 제시하고는 라이토를 유력한 용의자로 각인시키고야 한다.

결말의 인위적인 숭고함도 지적해야 할 부분이다. <데스노트>의 결말은 뮤지컬 <로빈훗>의 결말과 일부 궤를 같이 한다. <데스노트>는 허무한 결말을 완화하기 위해 앙상블의 합창으로 마무리한다. 이는 <로빈훗>에서 로빈훗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는 허무한 결말을 보완하기 위해 1막의 결말을 2막 마지막에 가져다 넣은 것처럼, <데스노트>에서 라이토의 하마르티아, 인격적인 결함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결말을 ‘무언가 있어 보이게끔’ 만들기 위해 고안한 앙상블의 합창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뻥튀기 연출이 아닐 수 없다.

▲ 뮤지컬 ‘데스노트’ 엘(L)-김준수 ⓒ씨제스컬쳐
라이토의 엘의 두뇌 싸움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테니스 대결 신을 넣었지만, 테니스 장면만으로 원작의 치열한 두뇌 싸움을 보완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해 보였다. 1막에서 라이토가 FBI 요원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때, FBI 요원이 누구와 만났는가 하는 CCTV 조회와 같은 수사의 기본을 일본 경찰이 지키기만 했어도 라이토의 연쇄 살인 행각은 일찍이 차단되었을지 모른다. 범법자만 골라서 처형하던 라이토가 왜 수사관마저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했는가에 대한 동기조차 뮤지컬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뮤지컬의 연출적, 또는 서사적인 구멍은 제아무리 뮤지컬계의 드림팀으로 짜인 배우들이라 한들 손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아닐 수 없다. 잘 짜여진 배우들의 신선함이 빛을 바랜 B급 레시피 요리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어찌 하랴, 원작을 한국 정서에 맞게 개선할 수 없는 레플리카(Replica - 대본, 음악, 동선 등을 변경 없이 그대로 옮겨 오는 것) 뮤지컬이기에, <데스노트>의 한계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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