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4년 8월 1일 한국 청소년야구대표팀은 캐나다 브랜던시의 웨스트브랜구장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미국에 11-10, 한점차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13년 만에 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당시 한국 대표팀의 주역은 경북고 이승엽(현 삼성라이온스)과 경남상고(현 부경고)의 김건덕, 휘문고의 김선우 등이었다.

한국 대표팀은 8-10으로 뒤지던 8회말 이승엽과 강의권(부천고)의 연속 안타로 만든 무사 1, 2루 기회에서 보내기 번트로 1사 2, 3루의 기회를 이은 뒤 김건덕이 중견수 앞 적시타를 터뜨려 동점을 이루는데 성공했고 미국 중견수 웨버의 악송구로 타자 주자인 김건덕이 3루까지 진출, 역전 기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미국 투수 폴크의 폭투가 나오면서 김건덕이 홈을 밟아 전세를 뒤집었다. 김건덕의 역전 득점은 이날 한국의 결승점이 됐다.

한국 대표팀의 에이스 투수였던 김건덕은 결승전 당시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1회초 4실점 하는 등 불안한 피칭으로 3회까지 5실점을 했지만 공격에서 5타수 3안타 3타점으로 맹활약했고 9회초 다시 마운드에 올라 한국의 결승점을 지켜내며 한국의 우승을 자신의 손으로 확정 지었다.

결승전 직후 대회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선수는 예상대로 김건덕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한 구단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언젠가 빛의 속도의 공을 뿌릴 동양 투수가 나왔다”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당시 김건덕은 이미 시속 150km 중후반대의 강속구를 뿌리는 선수였고 한 경기를 직구만으로 완투해 팀을 승리로 이끄는가 하면 1994년 각종 전국고교야구대회 15경기에 출전해 50타수 23안타 타율 4할6푼의 놀라운 타율로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초고교급 야구 천재였다.

김건덕은 경남상고에서 안병환 감독의 혹독한 지도로 선수로서 크게 성장했다.

특히 고교 2학년 때 당시 야인 생활을 하던 김성근 감독(현 한화 이글스)으로부터 일주일간 투구폼 지도를 받은 인연을 갖고 있다.

당시 김건덕의 투구폼을 지도했던 김성근 감독은 안병환 감독에게 김건덕이 얼마 후 있을 화랑기에서 일을 낼 것이라고 귀띔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경남상고는 5전 전승으로 화랑기를 제패하는 데 김건덕은 경남상고가 거둔 5승 중 4승을 혼자 따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열린 대통령기에서 김건덕은 팀이 치른 10경기에 모두 등판, 라이벌 경남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면서 김건덕이라는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서 팀의 에이스로서 한국을 정상으로 이끌고 김건덕 자신은 MVP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선수가 정작 국내 프로야구 무대에서 단 한 번도 두드러진 활약은커녕 정상적인 선수 생활 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한국 역사에 있어 가장 안타까운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건덕의 짧지만 굴곡진 인생 스토리가 그려진 뮤지컬 한 편을 대학로 무대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뮤지컬의 제목은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 글 초반에 소개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팅 리포트의 코멘트가 제목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인다.

뮤지컬의 내용은 김건덕이 청소년대표팀 동료 이승엽과 우정을 나누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대학과 프로의 갈림길에서 겪은 갈등과 갈등 끝에 선택한 대학 진학 이후 프로에 데뷔해 성공가도를 달리던 이승엽과는 달리 어깨 부상으로 제대로 된 선수생활을 하지 못하고 연이어 찾아온 불운과 불행에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과정, 그리고 절망의 바닥에서 다시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자신의 꿈을 찾아 재기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뮤지컬은 극중 김건덕과 이승엽이 대학 특기자 진학에 실패하고자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200점 만점의 40점 미만의 낮은 점수를 얻기 위해 고민하는 장면이나 김건덕과 고교 야구팀 매니저 정효정의 풋풋한 로맨스 장면, 그리고 극의 감초 역할을 맡은 ‘멀티맨’ 배우들의 재미있는 상황 연출 등과 극의 흐름에 적절한 음악이 어우러지면서 듣고 보는 재미와 즐거움이 가득하다.

한편으로는 국내 프로야구 구단들이 억대의 계약금을 들고 쫓아다니는가 하면 미국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까지 사로잡은 초고교급 야구 천재 김건덕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대학 진학 이후 야구팬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는지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는 함축적이지만 강렬하게 김건덕에 닥친 운명적인 고난과 시련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해 주고 있었다.

공연 자체에 관해 이야기 하자면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가 한국 최초의 야구 뮤지컬인 만큼 제작 단계부터 가장 궁금했던 점은 한정된 공간인 무대 위에서 어떻게 야구장이나 경기 장면을 묘사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는데 공연 속 경기 장면은 배우들의 적절한 연기와 음향효과, 조명을 조화롭게 구성함으로써 실제 야구 경기를 보듯 정교한 타격 폼과 역동적인 투구부터 번트, 땅볼, 외야 플라이, 홈런까지 야구에서 나올 수 있는 여러 장면을 생동감 있게 구현하고 있었다.

야구가 국내에서 국민 스포츠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지금, 야구를 소재로 한 다양한 내용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들을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펼치는 생동감 넘치는 노래와 춤 그리고 연기를 직접 눈앞에서 볼 수 있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공연을 통해 야구의 매력과 그 이면의 눈물겨운 스토리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런 의미에서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는 야구팬이라면 한 번쯤 찾아서 볼 만한 가치를 지닌 공연이다.

그렇다면 극의 실제 주인공 김건덕 씨는 현재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는 여전히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김건덕 씨는 모교인 부경고 코치를 거쳐 현재는 부산의 한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생활하고 있다.

공연의 실제 주인공인 김건덕 씨도 짬이 나면 서울로 올라와 배우들에게 투구폼을 지도해 주는 등 작품 제작과정에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화려했지만 한편으로 파란만장했던 제1의 야구인생을 거쳐 이제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모습으로 제2의 야구인생을 살아가면서 멋진 뮤지컬의 주인공이 되어 대중 앞에 돌아온 김건덕.

그는 더 이상 야구 천재는 아니다. 대신 그는 ‘비운’이라는 꼬리표를 떼어 버리고 행복한 야구인으로 살아가는 길 위에 서있다.

스포츠 전문 블로거, 스포츠의 순수한 열정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꾼다!
- 임재훈의 스포토픽 http://sportopic.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